김규항은 사회주의자이자 진보적 칼럼니스트이고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이다.
그는 <한겨례 21>의 정치성향 좌표에서 가장 좌파적이며 가장 자유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되었다. 학벌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 중 유일하게 자식에게 대학 선택권을 줘서 대학에 보내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보통 ‘B급 좌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이 별칭은 그가 <씨네 21>의 칼럼에 쓴 글을 모은 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 이 ‘B급’이라는 표현은 좌파로서의 삶의 어려움과 그의 자신 없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는 좌파의 삶이 우파의 삶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하는데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글이나 말이 아닌 일상 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좌파의 삶을 지속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B급이라도 좌파로 살 수 있다면”이란 생각에서 이 별칭을 쓰게 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한국 최고의 좌파명사”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극좌에 너무 경제적 특성만을 중시한다는 평과 “지식이 없는 지식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출처: 전대 신문)
[데일리안 윤순년]
◇ ⓒ 돌배게 |
시대의 위선을 꿰뚫는 B급 좌파 김규항의 두 번째 칼럼집. 2001년부터 2005년까지 『한겨레』『씨네21』『작은책』 등 각종 매체에 기고한 칼럼과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적은 단상과 사적인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규항 특유의 통찰력으로 정치사회, 인물, 문화 비평, 아이 키우기, 예수 이야기 등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개혁은 '변화를 피하기 위한 변화'라고 비판하며, 개혁과 진보의 차이, 그리고 진보주의의 이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현실을 외면한 채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진보적 지식인의 이중성을 비판하고 이오덕, 서준식, 윤구병 등 비타협의 정신을 대표하는 늙은 청년들과, 묵묵히 진보운동을 지켜온 활동가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동인권, 생태주의 같은 인류가 이룬 가장 최근의 정신적 진척들이 이미 가장 조화로운 형태로 들어 있는" 예수의 사상과 행적 속에서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시대의 위선을 꿰뚫는 직설의 미학
"세상을 향해 한 문장 한 문장을 날이 선 비수를 벼리듯 글을 쓰는" B급 좌파 김규항이 4년 만에 발표하는 두번째 칼럼집. 저자는 1998년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로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사회의 변두리에 가닿은 살가운" 시선과 비할 수 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 그리고 사회진보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을 담은 글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전해왔다.
전작의 제목이기도 한 'B급 좌파'라는 말은 어느덧 김규항을 이르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사회주의가 더 이상 이상이 되지 못하는 시대에 여전히 사회주의적 신념을 간직한 것에 대한 자조, 그리고 자신이 좌파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인간인지 끊임없이 되묻는 자의식의 표현이기도 한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진보주의자 김규항의 깊이와 진정성을 나타내준다.
신랄하고도 저돌적인 글로 숱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글을 한동안 제도 지면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글쓰기로 사회적 허명을 얻게 된 일을 그의 자의식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도 지면에서의 글쓰기 활동을 접은 동안 아이들을 통해 미래를 모색하고자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이 그에게 강제한'불온함'때문이었다.
민주화의 성과가 고스란히 자본의 차지로 돌아가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희망을 잃어가는 현실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신자유주의', 진보의 지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허구적인 개혁, 90년대를 마감하면서 청산한 진보운동의 이력을 내세워 살아가는 보수주의자들, 반동적인 사회의식을 생산하는 가장 결정적인 도구인 '한국 교회', 그리고 아이들에게까지 친구와 경쟁하라고, 돈을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는 이 시대 어른들…….
그의 글이 내뿜는 위선에 대한 신랄한 독설과 진실에 접근하는 진지하고도 비장한 태도는 이런 세상과 그의 비타협성이 만드는 긴장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한겨레』, 『씨네21』, 『작은책』, 『노동자의 힘』, 『GQ』 등에 기고한 59편의 칼럼과 2004년부터 2005년까지 www.gyuhang.net에 게재한 아포리즘의 형식의 단상과 사적인 기록이 담겨 있다. 몇 개의 문장으로도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그의 칼럼은 정치사회?인물?문화 비평, 아이 키우기, 예수 이야기를 특유의 통찰력으로 전해주고, 섬세한 삶의 결을 파고드는 그의 일기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생활인 김규항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개혁의 광풍 속에서 진보의 지분을 잃어가는 한국 사회
이 책에는 '개혁은 진보가 아니다'는 묵직한 주제의 글이 많다. 일견 원칙적이고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의 정치비평들은 한국사회를 보다 근본적으로 통찰하는 힘이 있다. 최근 몇 년간 개혁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언론개혁이나 정치개혁운동은 왜곡과 비리를 몰아내기는 했겠지만 세상의 본질을 변화시킨 운동은 아니었다.
저자는 '개혁이 세상을 바꾼다'는 견해가 만연해 있지만 우리 사회의 근본 구조는 민족이나 국가나 지역이 아닌 '계급'으로 나뉘어 있고, 개혁은 세상의 본질인 경제적이고 계급적인 부분은 눈곱만큼도 건드리지 않는 변화, 즉 '변화를 피하기 위한 변화'라고 비판한다.
사람들이 개혁의 미망에 빠져 있을 때, 노무현 정권은'국익'의 이름으로 파병결정을 내렸고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 농민의 삶이 벼랑 끝에 이른 것을 보면 그렇다.
끊임없이 대상의 옳고 그름을 가리고, 대상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그의 글들은 시의성이 강하나 일관된 시각 아래 씌어진 것들이다. 최근 들어 더욱 분명해진 그의 관심은 개혁과 진보의 차이, 그리고 진보주의의 이상을 알려나가는 것이다. 최소한의 안정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바로'진보'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이 사회의 얼개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 자신이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지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보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소통을 시작한 이유일 것이다.
오늘 현실을 외면하는 진보적 지식인의 이중성
진보적 지식인들의 이중적인 행태에 대한 그의 비판 역시 신랄하다. 진보라는 신념을 버렸음에도 여전히 10여 년 전 제 이력을 팔아 진보적 인사로 행세하는 386 정치인과 지식인에 대한 염오는, 대중문화 평론계에 대한 저자의 날 선 비판과 연결된다. 80년대 변혁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중문화는 저질적이고 퇴폐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반민중적이라 말해지곤 했다.
그러나 마당극, 탈춤, 소련식 집체극에 전념하던 시절에 타락한 양키 문화의 첨병이라 여겨지던 신중현이 어느새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옹립된 것은 인텔리들의 청산의 한 방식이었다.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 앞에서는 늘 객관적인 체하며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논평자들', '혁명가의 이력을 팔아 문화자본가로 행세하는 자들', 나아가'현실적 절망감을 우주적 깨우침으로 초월하려는 부류'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의 허위와 위선은 그의 직설 앞에서는 제 알몸을 드러내고야 만다.
반면 그는 이오덕, 서준식, 윤구병 등 굳건한 비타협의 정신을 대표하는 늙은 청년들과, 묵묵히 진보운동을 지켜온 활동가들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지지와 존경을 보낸다.
예수의 생애를 재조명
한국 교회의 보수화 문제가 교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은 개혁과 수구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한 최근 몇 년 새다. 그간 한국 교회의 보수화를 쟁점으로 다루는 일련의 작업이 있어 왔고 그 대부분은 역사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역동성을 깨닫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인생의 기준으로" 삼은 저자에게 기독교 문제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신앙의 흔적을 읽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남다른 접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에게 한국 교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책에 실린 '예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칼럼을 통해 저자는 예수의 삶을 오늘 현실에 비추어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섬겼으며, 현실을 떠난 초월적인 가치를 말한 적이 없으며, 타락한 성직자들과 결탁한 장사치들에게 '분명하게 분노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동인권, 생태주의 같은 인류가 이룬 가장 최근의 정신적 진척들이 이미 가장 조화로운 형태로 들어 있는" 예수의 사상과 행적 속에서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의 하나이자 교회를 빙자한 '상점'에 불과한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되새긴다.
사적인 단상에 담긴 소박하고 인간적인 모습의 저자_김규항
결혼생활 열세 해 동안 열세 번 이사를 다닌 고단한 생활인이지만 자신이 누구보다 풍요롭다고 믿는 사람이다. 동네 친구들과 운동하기 좋아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그는, 삶과 신념 사이에서 끊임없이 거리 좁히기를 시도하는 성찰적인 진보주의자다.
한때 드러머로 밴드를 꿈꿨고, 운동에 전념하느라 정작 영화에는 소홀했던 영화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밤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제대로 설명 못 하는 아비라고 자책하기도 하고, 남자로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 '삶의 시험지'로 딸을 생각하며 키우는, 자상하고 섬세한 두 아이의 아빠기도 하다.
장일호. 시사 in 기자의 글 입니다.
돈도 벌어야 했고, 대학도 가고 싶었다. 2003~2004년 당시 하루 두세 시간씩 밖에 자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챙겨보던 예능프로그램이 <느낌표> 속의 코너 ‘책을 읽읍시다’였다. 물려받은 문화 자본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지적 허영심만큼은 어마어마했던 가난한 집 맏딸이었던 나는 그 프로그램에 소개된 책을 허겁지겁 따라 읽어 나갔다. 머리가 굵은 지금이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책이 소개된다고 무작정 따라 읽지 않지만, 그때는 ‘좋은 책’의 기준이 너무나 절실했다. 아무튼 베스트셀러가 꼭 양서가 아니라는 느낌만큼은 있었으니까.
<느낌표>에서는 매달 ‘이 달의 책’을 선정했다. MC들은 본격적으로 어떤 책을 소개하기 직전, 길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니까 『B급 좌파』 라는 책 이름이 방송된 시간은 채 2~3초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내게는 그 말을 한, 단발머리에 붉은 립을 칠한 언니가 내가 너무 닮고 싶은 지성인의 얼굴이었던 게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불시에 ‘영업’ 당한 칼럼집 『B급 좌파』 를 읽고 난 후 더 이상 세상은 어제 같지 않았다. 나도 “여느 사람들이 이문열이나 김진명을 독서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구태여 촘스키나 부르디외니 하는 사람들을 읽”는(122쪽) 지식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언급된 두 저자를 내 책꽂이에서 장사 낸 것도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식인 코스프레는 너무나 어려웠고, 부르디외의 책은 지금껏 책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B급 좌파』 를 다 읽은 나는 정말 빨갱이가 되고 싶었다. 빨갱이가 멋있어 보였고, 세상의 많은 사건과 불의에 ‘연루’되고 싶었다. 2005년 대학 신입생에게 ‘워너비 운동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이상한지도, 그때는 몰랐다. ‘인 서울’ 턱걸이에 위치한 모교(사실 본교는 경기도에 있으니, 인 서울에 넣기에 다소 민망하지 않나 싶지만 우리는 그냥 우겼다)에서 목격한 학생운동은 입학한 해 3월 초 등록금 투쟁이 거의 전부였다. 그 투쟁의 ‘단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 따위에게까지 떨어졌는데, 13만 원쯤 돌려받아 흥청흥청 술을 먹을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다. 모교 운동권의 부박함을 안타까워하는 나에게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만난 K대 출신 어른은 “명문대에 가야 한다, 지금이라도 편입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지금 식으로 그이의 속내를 풀어보자면 “네가 더 노오오오오오력 했어야” 정도 아닐까. 그 말에 체한 밤에는 술을 많이 마셨다.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이 학벌 없는 사회 어쩌고 떠드는 거 너무 웃기지 않냐고, 진짜 설득력 없는데 또 그런 사람들이 떠들어야 그런 이야기가 그나마 사회에서 먹히는 게 현실이라 슬프다고. 정작 내가 붙들고 하소연을 한 친구도 정확히 그런 이유로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실패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의 위치를 내주고 있다.
앎과 실천은 그즈음 나를 온통 사로잡은 두 단어였다.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68쪽).” 엄마가 말하는 ‘불효’의 시작도 내 교양과 진보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테다. 나는 내 삶에도 교양을, 진보를 초대하고 싶었다.
『B급 좌파』 가 가장 크게 흔든 건 내 종교적 세계관이었다. 기독교 집안의 모태신앙으로 자란 나에게는 종종 떠올렸지만 해소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엄마는 하필 기독교를 택했을까. 왜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종교를 가지게 됐는가. 다만, 그런 마음이 당장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교회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다정했으며, 그때의 나에게는 그 울타리가 필요했다.
서울에 올라와 몇 군데의 교회를 거쳐 엄마가 정착한 ‘세계에서 가장 교인이 많은’ 대형교회는 많은 사람만큼이나 잡음이 많은 교회였다. 그 잡음의 중심에는 거의 대부분 담임 목사와 그 가족이 있었다. 그의 비리가 만천하에 방송된 후에도 사람들은 담임 목사와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우리’의 고난을 서로 위로하느라 바빴다. ‘MBC 시청 거부’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이 교회에 대한 저격수 역할을 <PD수첩>이 주로 담당해왔다)가 엄마의 성경책에, 동료들의 성경책에 붙는 모습을 보고 조금 휘청였다. 나는 우리 안에 속하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를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연약한 믿음을 탓하며 그저 울면서 기도하는 일이었다.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흔들림 없는 사람들의 맹목이 부러웠다.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그러니 이런 문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77쪽)” 교회라는 건물 밖에 ‘진짜 믿음’이 있다면,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나 역시 ‘진짜’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습관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 때문에 믿는 ‘척’을 한다는 사실이 용납하기 힘들어졌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교회는 물질 축복은 성실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114~115쪽).”
언스플래쉬
뿌옇기만 하던 나의 불만과 질문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앎은 실천되어야 했다. 충동적이었지만 삶이 내게 준 충동 앞에 똑바로 서자고 마음먹었다. 함께 아동부 교사를 했던 동료 선생 중 한 명은 나를 만류하며 교회의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남아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선언이 용기가 아니라 도망이라고 했다. 도리어 그 말이 위안이 됐다. 그의 말처럼 여러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사실은 문제를 느끼고 있다면 다행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 거대하고 부조리한 조직 안에 남아서 견디고 바꿀 자신이 없었다.
그즈음 내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다. 나는 무릎 꿇고 손을 모으는 대신 똑바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님 계시긴 한 거냐고. 내 것만을 구하는 것이 믿음이냐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 위에서 아파하고 있는데 나만 하나님 안에서 즐겁고 기쁘면 되겠느냐고.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부모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됐다고(78쪽). “예수는 니 꺼 남 주는 게 사랑이다. 너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라 그랬는데 교회는 믿으면 잘 살 수 있다, 남의 꺼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치니” 당신도 이 세상이 어처구니없지 않냐고, 때로는 비웃었다.
교회와의 단절은 예상보다 쉬웠지만 엄마와의 갈등은 쉽게 메꿔지지 않았다. 매 주일 반복됐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내게 조금의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그게 내가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퍼부었다. 정확히 내가 교회를 벗어난 그 이유로, 엄마는 나를 비난했다. 지긋지긋한 기복신앙이었다. 나는 교회라는 껍데기를 버린 거지 신앙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데도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의 ‘무지’를 나무라며 함께 퍼부었다. 그땐 돌려줄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인 것 같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경 구절을 줄줄 외던 딸, 성가대에 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딸의 난데없는 변심과 반항 앞에 엄마도 당황하지 않았을까. 교회와 교회 커뮤니티는 엄마에게 예나 지금이나 전부와 다름없었다. 그걸 부정하는 딸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엄마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못됐지만 조금은 즐겼다.
신앙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는 건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할머니 덕분이었다. 2011년 최저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았을 때였다. 바로 옆방인 노부부의 집에서는 자주 나지막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얇디얇은 벽을 타고 무람없이 공유되는 소리야말로 가난의 맨 얼굴이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한 달 간의 취재가 끝나고 짐을 싸던 내게 할머니는 미숫가루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아가씨, 교회 다녀? 교회 다녔으면 좋겠다.”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예수야말로, 그런 이성의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적힌 김규항의 글은 여전히 통증이 있다.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는 증명 같기도 하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시쳇말로 ‘구리다’고 생각하는 교조적인 칼럼이 몇 있긴 하다. 『B급 좌파』 를 처음 읽은 시간으로부터 10년 가까이 흘렀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나는 사람들의 욕망과 모순을 인정하는 순응주의자가 되었다. 한때 무척이나 굴욕적이라 생각했던 순응주의자라는 말은 내가 자주 걸치는 외투가 됐다. 어쩐지 지금은 빨갱이보다 그 말이 더 마음에 든다.
애먼 헤나시라는 평화운동가가 있다.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그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라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애먼 헤나시의 저 대답은 스물 몇 살의 나에게 단 하나의 정답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게 정답이 아니다. 아니, 무수한 정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는 예전처럼 함부로 확신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진실과 사실 앞에서 차라리 무력한 자로 남기를 선택했다. 모든 사안에 늘 명확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부럽다. 이는 얼마간의 존중과 조금의 경멸이 포함된 평가다.
내가 통과한 세상에 하나의 입구를 만들어줬던 20대의 선생은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를 뻔한 패턴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아, 그도 그대로 고여 버린 걸까. 김규항을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마음이 복잡하다. 1962년생인 그도, 1983년생인 나도 그저 모든 부분의 압축을 경험하고 있는 ‘동시대인’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내가 선생으로 여겼던 우상 하나를 깨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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