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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해외 야구 진출 역사

남형윤 2018. 7. 27. 22:51

 

- 지리산 정령치 한컷 -

 

(오마이 뉴스 : 김은식 기자]

"경동고가 국내에서 전승을 하고, 일본에 초청을 받고 가서 또 잘 했어요. 내가 또 홈런을 두 갠가 쳐서 잘 했고. 그 때 일본의 야구 관계자들이 나를 보고 일본에 오면 3천만 엔을 받을 수 있는 선수라고 평가했다는 기사가 났어요. 그게 계기가 됐어. 내가 그걸 보고 일본 프로야구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지." (백인천, 전 LG 트윈스 감독) 
 
 
▲ 3천만엔의 포수 경동고 포수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면 3천만엔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일본 야구관계자의 평가를 담은 기사. 이 기사는 고려대 진학을 꿈꾸던 소년 백인천을 일본 프로야구의 타격왕으로 바꾼 계기가 됐다.
ⓒ 동아일보
 
1960년, '원자탄 투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이재환(전 일구회장)과 배터리를 이룬 백인천은 경동고의 32승 2무 무패전설을 이끌었고, 서울운동장과 일본 진구구장, 대만의 송산구장에서 각각 기념비적인 홈런을 날리며 아시아 야구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올림픽 출전이 꿈이었던 그는 올림픽 정식 종목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를 겸해 단거리 전국 고교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런 분산된 노력이 오히려 그를 최고의 야구선수로 만드는 바탕이 됐다. 야구선수들이 금기시하던 근력운동에 일찍 눈을 떴을 뿐 아니라, 단단한 하체 힘과 스피드를 얻었기 때문이다. 장타력과 주력을 모두 갖춘 포수는, 지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백인천이 이끄는 경동고가 일본야구협회의 초청을 받아 그 해 고시엔대회 8강팀들을 상대로 순회경기를 벌여 3승 3무 2패의 놀라운 성과를 내고 돌아온 이틀 뒤인 1960년 12월 15일 동아일보에 "일화(日貨) 3천만엔의 포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 그 기사를 읽은 백인천은 인생 계획을 수정했다. 고려대에 진학하려던 그는 일본 프로야구단 입단으로 방향을 수정했고, 그 꿈을 한 해라도 앞당기기 위해 실업팀 입단을 결심했다. 그리고 실업팀 농협에 입단하면서 '언제든지 해외에 진출하게 되면 놓아달라'는 조건을 달아 동의를 얻고, 국제대회에서 성과를 내고 정부 고위 인사와 대면할 기회가 생기자 '일본 진출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 끝에 그는 1962년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하면서 해방 이후 한국인 최초의 프로야구선수가 될 수 있었다. 계약금은 그가 꿈꿨던 '3천만 엔'의 10분의 1인 3백만엔에 불과했지만, 꾸준히 성장해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오르기도 하면서 1980년에는 1500만 엔의 연봉을 받기도 했다.
 
 
▲ 스피드 스케이팅 고교 1위 백인천 1961년 동계체전 고등부에서 경동고의 백인천은 49.9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그 기록은 대학부 우승자의 기록(51,2)보다도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동계 올림픽에 출전해보고 싶었던 그의 꿈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겸업 덕분에 그는 단단한 하체를 기반으로 빠른 스피드와 장타력을 갖춘 포수가 될 수 있었다.
ⓒ 백인천
  
백인천과 이원국, 해방 후 한국의 1,2호 프로야구 선수

 

5년 뒤인 1967년, 중앙고 출신의 투수 이원국이 일본 프로야구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하면서 백인천의 뒤를 이었다. 중앙고 시절 함께 뛰었던 이광환 전 서울대 감독은 '키가 크고 공이 굉장히 빠른 투수였고, 성격이 순하고 말도 많지 않은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185cm의 장신이었던 이원국은 1965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에서 부산고와의 결승전에서의 17탈삼진을 포함해 모두 4경기에서 58개의 삼진을 빼앗고 단 1실점으로 막아내며 중앙고의 우승을 이끌었고, 최우수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선수로서의 이력은 순탄하지 않았다. 1967년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하긴 했지만 팀당 보유 가능한 외국인 선수의 수를 2명씩으로 제한하는 규칙이 신설되고 팀내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단 1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결국 도쿄 오리온즈 소속의 연수선수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3년간 16승을 기록한 뒤 다시 멕시코로 넘어가 비로소 정착할 수 있었다. 1972년 멕시칸리그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에 입단한 그는 이후 11년간 2000이닝 이상을 던지며 다승왕을 경험하는 등 모두 149승을 기록해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에 오르는 정상급 투수가 되었다.

 

1960년대 백인천과 이원국의 해외 무대 진출은 다분히 돌출적인 성격이 있었다. 동시대에 한국 야구의 수준이나 한국 야구계에 대한 해외 무대의 관심과는 무관하게 독보적인 신체조건이나 신체능력을 가진 선수가 나타났고 해외 리그와 연결되는 행운이 겹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 년이 경과하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1975년부터 세계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한국야구대표팀이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는 우승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1977년에는 세계대회에서 진검승부를 벌인 일본을 처음으로 꺾으며 일본 프로야구계의 관심도를 한층 높였고, 대회 때마다 개인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관심까지 끌기 시작했다.

 

1970년대 한국 야구, 해외 스카우터들의 출장지가 되다

 

1975년 1월에는 고려대의 대형 포수 김승수가 일본 롯데 오리온즈의 스프링캠프에 초청받았고, 그 해 여름에는 국가대표 투수 강용수를 놓고 역시 일본 롯데 오리온즈 구단과 감독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같은 해 가을 대륙간컵 대회를 마친 뒤에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400승을 올린 전설적인 재일동포 투수이자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경홍)가 장효조, 김일권, 이선희를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우승한 뒤에는 최동원과 차영화, 그리고 1979년에는 이선희와 김재박이 각각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리그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다.

 

그 중 일부는 진지한 영입 제안이라기보다는 '영입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이었고, 때로는 '온다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덕담 정도가 와전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한국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는 이전 어느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져 있었고, 그것은 한국 야구의 수준과 위상을 반영했다. 예컨대 1981년, 대학야구 최고의 포수였던 한양대 졸업반 이만수 역시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도, 해외로 나가서 프로선수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상했을 만큼 당대 한국의 수준급 선수들에게 해외 프로야구란 아주 아득하지는 않은 현실적인 꿈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이룬 것은 세계대회 최우수선수 이선희나 단골 베스트나인 김재박도 아니었고, 세계적 수준의 강속구와 커브의 배합으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을 매료시킨 최동원도 아니었다. 공군 병장을 달고서야 처음으로 스포츠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늦깎이 투수 박철순이었다. 
 

 

 
▲ 첫 우승과 에이스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OB 베어스의 선수들이 마운드의 박철순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 두산 베어스
 
이선희와 김재박이 아닌, 박철순이 태평양을 건너다

 

부산과 대전을 거쳐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만큼 순탄하지 못한 성장기를 보낸 박철순은 좋은 체격조건 덕분에 연세대에 진학했지만 1학년을 마친 뒤 자퇴하고 군에 입대했을 만큼 선수로서의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공군 야구팀인 '성무'에서 만난 포수 이종도의 자극과 후임병으로 들어온 야구선배 남우식의 조언을 계기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특히 1971년 경북고의 전국대회 본선 경기 거의 대부분을 혼자 던져 완벽하게 막아내면서 전관왕 신화를 쓴 고교야구 역사상 최강의 투수 남우식과의 만남은 결정적이었다.

 

"상병 땐데, 이등병으로 남우식 선배가 들어왔어. 나는 군대에 일찍 갔고, 그 선배는 한양대 졸업하고 늦게 왔으니까. 하지만 군대는 '짬'이잖아. 또 그 선배는 워낙 유명했지만 나는 별 볼 일 없었으니까,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셨고. 내가 잠깐 따라 나오라고 했어. 상병이 따로 불러내니까 이등병이 바짝 쫄았지. 그런데 단 둘이 있는 데로 가서 깎듯이 인사드리면서, 평소에 선배님을 존경해왔습니다. 저도 투수인데, 제가 공 던지는 걸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했어. 그랬더니 좀 당황하셨지만, 상병이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그 뒤로 1대 1 과외를 받은 거지." (박철순, 1982년 한국프로야구 mvp)

 

당대 최고 투수의 지도와 격려는 박철순에게 비로소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처음으로 세심하게 교정된 투구폼은 그의 잠재력을 일시에 폭발시켰다.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나서 그 해인 1978년 대학과 실업과 군팀이 모두 출전하는 백호기 대회 결승에서 최동원이 나선 모교 연세대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했다.

 

박철순이 전역하자 연세대는 3년 전 그가 제출했던 자퇴서를 찢어버리고 두 팔 벌려 환영했고, 그렇게 복학생이 된 박철순은 1979년 네덜란드 할렘에서 열린 국제야구대회에서 한국야구사상 최초의 쿠바전 승리투수가 되면서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그 경기를 계기로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하게 되면서 이원국에 이은 미국 프로야구의 두 번째 한국인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병역 의무의 벽과 프로야구 창설의 명분

 

182cm의 좋은 체격과 빠른 공이라는 장기가 있긴 했지만, 박철순이 그보다 한 수 위의 경력을 가진 이선희, 김재박, 최동원이 가지 못한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가 군필자였기 때문이다.

 

고교시절부터 늘 스카우트 경쟁의 대상이었던 보통의 스타플레이어들은 대학에서 스카우트 과정에서 얻은 혜택에 충분히 보답하고 실업팀 취업을 확정한 이후 군에 입대하는 것이 상식이었고, 1981년 말 병관련 법이 개정돼 선수들의 병역 특례가 가능해진 뒤로는 국제대회에서 공을 세운 뒤 병역특례혜택을 받는 길을 노리게 되면서 더욱 입대를 미루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력한 선수들에게 해외 진출이란 '군대에 다녀온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게 되고 보면 해외 구단 입장에서는 너무 나이가 많아져 버려 매력 없는 선수가 되기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복무를 마친 박철순에게는 그 결정적인 벽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197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야구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고, 실업팀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몸값과 엄청난 성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본과 미국의 프로야구팀들을 향한 선수들의 꿈도 부풀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높은 벽은 병역의 의무였지만, 흔히 예상하지 못한 '박철순'이라는 선수로부터 그 벽을 넘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르는 선수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직 스포츠의 세계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대, 한국의 야구인과 정치인들은 '국내 우수 선수들의 해외 유출을 막을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런 고민의 결과는 프로야구 창설의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1981년, 프로야구 창설을 총괄한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은 '남들이 10년에 벌 돈을 1년에 벌 수 있게 해줘야 우수한 선수들이 모두 프로에 모인다'며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 기준을 실업야구 1류 선수의 10배로 못 박았다. 그것은 해외 리그와 비교해도 국가대표 출신들을 의미하는 'A'급 선수들의 경우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의 평균연봉 이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 트윈스의 첫 우승과 백인천 감독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한 첫 해 우승을 차지한 LG 트윈스. MBC 청룡의 창단 감독이었던 백인천은 LG 트윈스에서도 창단감독이 됐고, 동시에 첫 우승 감독이 됐다.
ⓒ LG 트윈스
 
그래서 그 해 겨울, 귀국해서 휴가를 즐기며 다음 시즌을 준비하던 박철순은 메이저리거의 꿈을 포기하고 창단을 앞둔 OB 베어스에 입단하기로 결정하는데, 그가 받은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2천만원과 2400만원. 연봉만 따져도 그가 마이너리그 더블 A팀에서 받던 것의 3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그것은 일본에서 이미 정상급 선수의 반열에 올라있던 백인천도 다르지 않았다. MBC 청룡의 '플레잉 감독'이었던 그는 감독의 연봉과 선수의 연봉을 따로 받았는데, 그것을 합친 3600만원은 일본에서 받았던 최고 연봉에 근접하는 수준이었다. 최소한 80년대 내내, 한국인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억제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압도적인 수준의 연봉이었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의 원년이 된 1982년, 일본에서 돌아온 22년차 프로선수 백인천은 4할1푼2리의 기념비적인 타율을 기록하며 유일무이한 4할 타자가 됐고 미국에서 온 3년차 프로선수 박철순은 시즌 80경기 시대에 22연승을 포함한 24승을 기록하며 초대 시즌 MVP 자리에 이름을 새겼다. 기회의 땅을 찾아 떠났던 그들에게 한국은 더 큰 기회를 쥐어 주었고, 그렇게 돌아온 그들을 통해 한국야구는 빠르게 기반을 다지며 더 큰 성장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