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小史와 歷史를 정리해 보다

20. 1987년 小史(대학 1학년)

남형윤 2021. 12. 10. 14:40

1. 1987년은 내가 진주간호보건전문대학 1학년 이었다. 1987년은 내 인생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치열하고 뜨거운 해였다.진주간호보건전문대학 치기공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1학기 동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열심히 학과 공부도 하였다. 삼천포에서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통학을 했다. 1시간3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2학기부터는 너무 힘들고 지쳐 학교 부근에서 김정구 친구와 자취를 하면서 처음으로 독립된 20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 학교에서는 입학과 동시에 학보사 수습기자로 지원하여 학보사 학생기자 활동을 병행 하였다. 이즈음 시국과 정치에 많이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고, 학내에서는 관선이사 선임과 관련한 학내 비리 사건이 이슈가 되어 입학과 동시에 학생회 주최로 많은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학내 기자로 취재를 하면서 민중가요를 접하고, 학생운동권 대열에 조금씩 발을 디디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87년 여름은 대한민국이 가장 뜨거운 시대였다. 이곳 진주에서도 서부경남 최대의 교육도시 답게 경상대학교와 진주농전 등에서 전국적인 집회와 시위가 뜨거워 지고 있었다.

 

이런 사항을 취재하면서 시위와 집회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고, 나아가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취재를 우해 광주를 찾았고 망월동을 참배하고, 비디오 테이프를 보았고, 광주의 아픔을 알았고 진실된 역사적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들을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학생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당연히게 시대의 젊은이 답게 작은 학생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혈기 왕성한 20대를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 전두환 정권의 4.30호헌 선언으로 정국은 회오리 치기 시작하였고, 박종철 치사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뜨거운 6월이 시작 되었다. 이곳 진주에서도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 기간 중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개최하였고, 경상대학교, 진주농전 사거리에서도 매일매일 투석전과 집회와 강연들이 이어졌다. 백골단과 경찰들의 강압적인 진압작전과 이를 피하며 집회와 투석전으로 맞서는 학생들과 최루탄이 난무하고 부상자들이 속속 발생하는 살벌한 시기도 내내 계속 되었다. 시민들의 지지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결국은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백기완 선생님의 사자후 연설은 나의 피를 끓게 만들었고, 그분을 존경하는 기회가 되었다. 민주화 열기는 전국을 강타했지만 이곳 시골에서도 그 열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마침내 6.29선언으로 민주화를 몸소 이룩했다는 감동과 열정이 우리를 들떠게 하였다. 참으로 가열하고 뜨거웠던 1987년의 6월 이었고, 그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이 나의 인생 전반을 크게 좌우하는 시대였다.

 

- 이런 시절을 뒤로하고, 20살의 첫번째 여름방학이 시작 되었다. 둘째형이 지원해 준 전성일 원장의 신념대학 속리산 캠퍼에 참석하여 3박 4일동안 생활했었다. 이 시간으로 자심감 향상과 자립에 대한 큰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좋은 프로그램 이었다. 방학 기간 중에 큰형님 댁에 잠시 머물면서 큰조카의 과외공부를 도와 주기도 했다. 한편, 학보사 선배님들과 동기들이 함께 MT를 지리산으로 가서 의미있는 반학기를 되돌아 보는 시간을 마련하였으며, 이 시간 중에 태풍 셀마가 경남 지역을 덮쳐 지리산에 갖힌 우리들도 엄청 고생과 위기를 넘겼다. 하산하는 도중에 급류에 휩쓸려 죽을뻔한 위기를 경험한다. 지리산에서 벌써 두번째 경험이다. 이때, 어머니와 큰누님이 나와 연락이 되지 않고 지리산에서 큰 물난리가 나서 등산객 사망 소식이 들여 큰일이 났다고 생각하여 급하게 학교를 찾아와 나의 행방을 찾아 헤메는 헤프닝도 있었다.

 

- 드디어, 1학년 2학기가 시작 되었다. 대학생활 1학기 동안 개인적으로도 많은 경험과 번화들이 있었고, 국내 정치사에서도 87년 민주화 대항쟁 사건이 있었으며, 학교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반년의 경험이었다. 2학기가 시작 되면서 학과 공부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학보사 수습기자 생활도 어느정도 안정을 찾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고등학교때 배운 기타가 매우 쓸모가 있었다. 학교 밴드부 카디아에서 멤버를 모집하는 공고가 붙었고, 지원을 하게 되었고, 기타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막연한 밴드부 생활과 노래에 관심이 많았고, 작은 학교라서 기타를 잘 치는 친구들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부족한 실력으로도 밴드부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친구들과 호흡을 맞추어 열심히 연습을 했었다. 김정구, 신미랑, 유재현, 정경희가 87년 동아리 카디아 밴드 멤버들이다.

 

공부는 거의 뒷전이고, 매일 밴드부 지하창고 연습실과 학보사 방에서 그리고, 친해진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을 축제 연습과 밴드 동아리 정기 발표회 기간이 가까와 지면 거의 밤샘을 하면서 밴드 선배님 집과 연습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연습에 몰두합니다. 드디어 가을 축제 시즌을 의미있게 밴드 활동으로 보내고, 가장 중요한 행사인 밴드 발표회를 지하 강당에서 개최 합니다. 이때는 주로 2학년 선배들이 많은 시간을 공연하고, 뒷부분에 잠깐의 1학년 멤버들이 3곡 정도 연주를 하는 스케쥴 입니다. 간호보건대학 특성상 학교에는 여학생이 90%이상 이고 나머지 인원이 남학생인 관계로 여초 현상이 매우 심한 인원 구성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학보사 활동도 하고, 밴드 활동도 함께하면서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부르는 나는 작은 관심과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런 관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는 기쁨이고 행복한 시간 이었습니다. 작은 영웅심리가 발동하기 마련이고, 가끔씩 이런 인기를 누리면서 만족스런 학교 생활을 즐깁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바쁘고 행복하게 2학기를 보낸것 같습니다.

 

- 한편으론, 1학기 4월 부터 삼천포 중앙시장에 사는 간호과 여학생이 눈에 들어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첫번째 이성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제대로 데이트 한번 못하고 짝사랑으로 끝을 맺었고, 이후에는 과 여학생, 학보사 동기들, 밴드 동기들이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들로 작은 연애사가 있었습니다.

 

2.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가 불러온 민주화 세력의 저항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발전하였다.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군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후 직장인들과 중산층까지 시위대에 합류하여 대한민국은 6월 민주항쟁으로 뒤덮였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으로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민중들에게 정권이 항복 선언을 하였다.

 

3.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합의하에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고, 93.5%로 압도적인 헌법개정이 되었다.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국민 기본권 대폭적 확대 되었고,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여망과는 반대로 양김의 단일화 실패와 김종필도 출마로 4파전이 전개되었고, 허무하게도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어 6공화국이 탄생하였다.

 

4. 6월 항쟁은 노동자 대투쟁도 함께 전개 되었고, 현대그룹 개열사에서 봇물처럼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중소기업.대기업.공기업. 언론사. 금융회사 등 전국의 모든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동안 쌓였든 불만과 불평등이 한꺼번에 솟아져 나와 임금인상과 노동조합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

 

5. 1987년은 학생운동도 4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 협의회(서대협)가 결성되었고, 8월에는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전대협)이 발족되어 학생운동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이밖에도 문인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결성하였고, 여성계는 한국여성단체 연합이 결성되어 여서운동도 활발하게 되었다.

 

6. 경제분야는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범양상선과 대한 선주가 부실화 되었고, 범양상선 사주 박건석 회장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쪘다. 한국전력이 우리나라 전기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tv를 통한 우리나라 국산 애니메이션이 처음으로 방송되었다.

 

7.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집단으로 탈북 하였으며,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발생하여 박인근 외 5명이 구속되엇다. 이 사건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특수감금과 강제노역에 대한 형벌이었으나 실상은 살인과 유기 등 큰 숨겨진 진실이 훨신 튼 사건이다.

 

8. 대한항공 858편 b 707여객기가 바그다그발 서울행 여객기가 버마 상공 인다만에서 폭발 115명 전원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현희가 범인으로 밝혀졌지만 아직도 미스테리한 결말을 가지고 있다. 7월에는 태풍 셀마가 남해안과 부산지역에 물폭탄을 퍼부어 609명이 사망 및 실종되었고, 5,600억의 재산손실이 있었으며, 이는 사라 이후 최대의 인명 및 재산 손실을 입힌 태풍으로 기록되었다. 우리나라 첫 에이즈 환자가 사망하였다.9

 

9. 국제뉴스는 고르바쵸프 소련 서기장이 개혁과 개방을 정책으로 하였다. 서독청년 마티아스 루스트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경비행기로 착륙하는 동안 레이다에 잡히지 않아 소련의 방공망이 큰 망신을 당하였다. 필리핀 마닐라 인근에서 도냐파스호 여객선과 벡터호 유조선이 충돌하여 해상사고 최고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전부 4,375명이 사망하는 사상초유의 해상사고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