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小史와 歷史를 정리해 보다

1981년 - 2020년. 한국-세계 주요 뉴스

남형윤 2022. 7. 20. 12:55

 

- 1981년

1981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88년 올림픽 서울 유치
2. 교육세 신설  
3. 전두환 대통령 방미
4. 하형사 사건
5. 윤상군 살해범 검거  

6. 경산 열차추돌사고
7. 통금 해제 건의안 통과
8. 60억불 안보경협문제
9. 정부기구 축소
10. 박세직 장군 예편

 1981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사다트 암살
2. 이란 국내 테러
3. 폴란드 비상계엄
4.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당선
5. 레이건 피격

6. 이란 미 인질 석방
7. 바오로 교황 피격
8. 석유값 인하
9. 우주 왕복선 발사
10. 유럽의 반핵운동

정치적으로는 전두환이 새 헌법에 따른 선거인단식 대통령 선거를 통해 연임하면서 '제5공화국'이 출범됐고, 계엄령도 2년여 만에 해제됐다. 이에 따라 3년만에 다시 치러진 11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이 승리했고, 나머지 의석은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 등 관제야당들이 채움으로써 국회는 '1대대-2중대-3소대' 체제가 됐다.

경제적으로는 1979년~1980년의 제2차 석유 파동의 영향으로 경제적 혼란이 심각해져 이로 인해 많은 주화의 발행량이 축소되었는데 이 당시 나온 5원, 10원, 100원 동전들은 100,000개씩 밖에 발행되지 않아 상당히 귀하다. 하지만 -1.7%을 기록한 전년도보다 경제성장률이 7.2%로 크게 오르고 12월 19일에 수출 200억 불을 달성해 한국 경제는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또한 대흉년이었던 전년과 다르게[1] 1981년도 쌀 작황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 가스 폭발 사고가 터져 LPG 가스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깨닫게 해준 해이기도 한데, 8월 안양 대교보신탕 폭발사고 및 12월 대한화재 빌딩 지하식당 가스 폭발사고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해 공화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전임 지미 카터 대통령의 도덕정치/인권외교를 버리고 대소/반공 강경책으로 일관해 미소 간 관계는 대립 일변도로 치달았다.

또한, 이 해는 세계 지도자들의 암살 및 암살 시도가 유난히도 많았던 굵직굵직한 해였다. 3월 30일에 있었던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부터 시작해서, 5월 1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 사건, 5월 30일에는 방글라데시의 대통령이었던 지아우르 라흐만이 암살됐고, 8월 30일에는 이란 대통령이었던 라자이가 암살, 뒤이어 10월 6일에는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그야말로 죽음의 신이 세계 지도자들의 주위에서 죽음의 무도를 추던,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길한 해였다.

그리고 이 해에 국제연합에서 세계 장애인의 해[2]가 선포되어 그 일환으로 우리나라에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만들어졌지만, 당시의 장애인들에게 사회의 시선은 참담하고 냉담했었다.[3]

대구시 인천시가 각각 동년 7월에 경상북도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경기도에서는 시흥군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통합되어 '광명시'로 새로 출범되었고, 송탄읍이 평택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 전라남도에선 광산군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져 '금성시'가 되었다.

1월 5일 경기도 양평군의 최저 기온 -32.6℃, 월평균 기온 -13.5℃로 엄청난 한파 기록을 보여주며 공식 기록으로 대한민국 역대 최저 극값을 기록했다.

 

- 1982년

1982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통금해제-교복자율화
2. 실명거래제 파문
3. 부산미문화원 방화
4.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5. 의령 우순경의 난동

6. 전두환 대통령 아-가순방
7. 윤노파 박양사건 무죄
8. 김득구선수의 사망
9. 이-장부부 어음사기
10. 김대중씨 석방 도미치료

 1982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포클랜드 전쟁 
2. 波 자유노조 해제
3. 팔레스타인난민 학살
4. 나까소네 내각 출범
5. 군축-미사일 논쟁

6. 스페인에 좌파정권
7. 중국 새 헌법 채택  
8. 蘇 안드로포프 집권
9. 중국-소련 화해무드
10. 국제 불황 歐美 실업 

 

이 해에 한-미 양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기준으로 수교 100주년을 성대히 기념했고, 3월 27일 한국프로야구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또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돼 밤중에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듯이, 상반기엔 우범곤 사건으로 충격을 줬고, 5월 들어 이철희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이라는 대규모 권력형 비리스캔들이 터져 국민들로부터 "정의사회구현 좋아하네"라는 말이 나돌게 만들었다. 해외 대중음악계에선 마이클 잭슨이 음반 Thriller를 발매하며 문화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전반으로 인종주의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 앨범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으며, 이 해를 기점으로 "듣는 음악"에 더해 "보는 음악"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국제연합에서는 이 해를 '남아프리카 제재 완화의 해'로 지정했다.

지폐로만 존재했던 500원짜리 화폐가 주화로 처음 발행되었다.

한국에서는 뛰어난 야구선수들이 많이 태어난 해이다. 추신수, 오승환, 이대호, 김태균, 정근우가 1982년생.
 
 
- 1983년
 
1983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아웅산 암살폭발사건
2. 구속학생 사면-복교
3. KAL여객기 피격
4. 중국 민항기 피랍
5. 대형 금융부정사건

6. 대도 조세형 탈주
7. 이산가족찾기
8. 나까소네 일본 수상 방한
9. 레이건 미대통령 방한
10. 북한 이웅평 귀순
 

1983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아웅산 암살폭발사건
2. 안드로포프 장기유고
3. KAL여객기 피격
4. 미-소 핵협상 결렬
5. 베이루트 폭탄 테러

6. OPEC 유가 인하
7. 아키노 암살사건
8. 바웬사, 평화상 수상
9. 미, 그레나다침공
10. 일본 자민당 총선 패배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으로, 이 해에는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북한에 의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이에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퍼싱-II 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는 등의 보복을 단행함으로써 제3차 세계대전의 문턱까지 가기도 했다. 또 세계를 멸망시킬 우발적 핵전쟁의 가능성이 또 한 번 세계를 스쳐 지나갔다.

KBS1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처음으로 전파를 타 삼천리 방방곡곡에 눈물과 감동으로 만들어놓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서울 여의도 KBS 사옥 벽면을 보면 온통 이산가족을 찾고 있다는 메모들이 붙어있었는데 KBS 역사에 있어서도 기억에 남게 되는 부분으로 회자되고 있다. 더군다나 그해 12월 21일에 전두환 정권이 '학원자율화조치'를 마련해 해직 교수들과 제적 학생들이 복권되어 '유화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주춤하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다음 해부터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 경제계에선 신흥 기업집단 명성그룹이 불법대출 사건으로 해체됐고, 영동개발진흥도 어음 부정보증으로 무너져 이슈가 되었다.

한국 만화계 역시 1983년은 가장 의미깊은 해이기도 한데, 육영재단의 만화잡지 <보물섬>에 훗날 국민캐릭터로 자리매김할 김수정 화백 작품 <아기공룡 둘리>가 첫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현세 화백도 같은 해에 불후의 명작 <공포의 외인구단>을 출시해 만화방 이용객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영미권 대중음악도 이 시기가 최고 격변기이다. 폴리스 등의 뉴웨이브 음악이 유행했고 동시에 유리스믹스 등의 신스팝이 태동기를 보였으며 팝씬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를 발매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80년 디스코가 몰락하고 나서 1981~1982년[1]의 과도기 이후 가장 큰 음악적 격변이 일어난 해로, 이 시기부터 1970년대의 영향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인천직할시는 개항 100주년을 성대하게 맞이했고, 유엔에서는 이 해를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해'로 지정했다.

1원, 5원, 10원, 50원, 100원 주화의 디자인들이 모두 500원 주화 디자인으로 변경/통일 되었다. 이후에도 이 모습의 동전들을 사용하고 있다.[2]

대한민국 한정으로 이해찬이 1999년에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고교 교육 정상화를 위한 새로운 대입제도를 마련해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3] 하지만 첫 1세대들이 응시한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이전 몇 년과 비교했을 때 가장 어렵게 출제됨으로써 학생들의 점수가 폭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엔 이해찬 세대라고 불리며 "단군이래 최저학력"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1세대들이 바로 1983년생들이다.

합계출산율(2.06명)이 인구대체수준[4]을 못 넘기기 시작했다.
 
2022년 기준 1983년생들은 올해가 30대의 마지막이다.
 
 
 
 
- 1984년
 
 
1984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학생들 민정당사 농성
2. 한강 대홍수 189명 사망
3. 2,3차 해금과 신당
4. 한국-중국 스포츠 교류
5. 판문점 소련인 망명

6. 전두환 대통령 일본 방문
7.수해물자와 남북회담  
8. 교황 한국 103위 시성
9. LA올림픽 10위 개가
10. 정래혁씨의 축재 파급
 
 
 
 1984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레이건 미국 대통령 재선
2. 간디 인도 수상 암살
3. 소련 체르넨코체제 등장
4. 아프리카 기아
5. LA올림픽 동구권 불참

6. 미국 고장위성 회수  
7. 교황청 해방신학 논쟁
8. 인도 가스누출 대참사
9. 중국 경제개혁안 채택
10. 영국, 중국 홍콩 협정
 
 
 
체신부에서는 1884년 우정총국 개국을 기준으로 '한국 우정 100년'을 성대히 맞이했고, 한국 천주교계에선 1784년 이승훈 청나라에서 세례받고 귀국한 걸 기준으로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했다. 이에 따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역대 교황들 중 최초로 한국을 방문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첫 작품 <터미네이터>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개봉하여 유명세를 탔던 해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잇고 있는 중이며 2019년엔 6번째 작품인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까지 개봉했다.[1]

이 해 11월부터 일본 슈에이샤 만화잡지 소년 점프 52호에서 전설적인 만화로 추앙받는 드래곤볼이 첫선을 보였고, 한국 만화계에선 신인작가 신일숙 화백이 순정만화 <라이언의 왕녀>로 데뷔한 후 단숨에 스타반열에 들어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 해에는 미국 LA에서 하계올림픽이, 구(舊)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특히 LA 하계올림픽에서는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부분 불참하여[2] 반쪽짜리 대회로 전락하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종합 10위를 달성하였다. 그리고 이해를 기점으로 합계출산율이 2.0명 아래로 떨어져(1.74명) 지금까지도 40년 가까이 출산율이 2.0명을 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소련 지구 최후의 날 기계 죽음의 손이 가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정치적 사정을 이유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였던 대한민국이 이 해에 열렸던 LA 올림픽에 참가함에 따라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국내에 올림픽 열기가 다시 달아오르게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반대로 북한은 불구대천의 원수국가에서 열리는 LA 올림픽에 불참했으며 4년 후 열리는 남한의 서울 올림픽에도 불참하였다. 북한이 올림픽에 다시 출전하게 된 것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였다.

또 데이비드 스턴 총재가 수장으로 취임한 NBA의 세계화 원년이며 코트 위의 별들이 가장 많이 뜬 해이기도 하다.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찰스 바클리, 존 스탁턴, 샘 퍼킨스, 케빈 윌리스, 번 플레밍, 오티스 도프, 앨빈 로버트슨이 대표적이다.

아무래도 1984라는 소설의 임팩트도 있고, 옛날식의 SF영화 중 걸작 터미네이터가 만들어진 해여서 그런지 영미권에서는 1984년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래되고 정말 구식인 것'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 식당 인테리어는 너무 구려서 들어가면 1984년으로 돌아간 것 같아"라던가... 대한민국에서 종종 쓰이는 쌍팔년도(1988년)와 비슷한 맥락.

가장 최근에 음력 10월 윤달이 든 해였다. 날짜는 11월 23일부터 12월 21일까지.[3] 다음 윤10월은 182년 뒤인 2166년에야 온다.
 
 
 
- 1985년
 
 
 1985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2.12총선과 신민당 등장
2. 남북 고향방문단-예술단 교환  
3. 노-노체제 출범
4. 미보호주의와 한-미무역마찰
5. 미문화원-민정연수원 점거

6. 월드컵축구 32년만에 본선 진출
7. 중국군용기-어뢰정 불시착
8. 예산안파동과 의원보좌관 구속
9. 노-사분쟁과 위장취업 파동
10. 장기적 경기침체와 실업자 증가
 
 

 1985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달러화 폭락과 엔화 평가절상
2. 비 정정불안과 대통령 선거
3. 미, 납치범태운 여객기 요격
4. JAL기 추락 5백20명 사망
5. 피랍 이여객기 인질 유혈구출

6. 소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7. 미-소 정상 6년반만에 회담
8. 콜롬비아 화산 폭발
9. 제2의 '흑사병' AIDS확산
10. 멕시코시 지진 참사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이 해는 부처님오신날이 5월 27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월 이전에 윤달이 없었다. 베트남에서는 1984년 윤 10월이 없었고 1985년 윤 2월이 있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  도시철도의 개통이 많았다.[1] 특히 서울지하철 3호선과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은 노선 색깔(주황색)까지 똑같은데다가 빨리 개통하기 경쟁을 벌였다.[2] 승자는 서울지하철 3호선이긴 한데, 약간의 부정행위가 있었다.

밑의 사건 목록에서 보듯, 3개의 노선들 중 가장 먼저 개통한 서울 지하철 4호선은 3개월 앞선 4월에 상계-한성대입구 구간을 개통했고, 서울 지하철 3호선은 7월에 구파발역-독립문역 구간만 부분 개통했기 때문. 원래 서울 지하철 3호선은 양재역까지 개통시키려 했는데 부산 도시철도 1호선한테 밀릴까봐 독립문역에서 끊어버린 것.[3] 하지만 부산 도시철도 1호선도 이해에 1차 구간만 개통했고 1달 뒤인 비슷한 시기에 착공한 2차 구간은 2년 후인 1987년에 개통했으니 사실상 도찐개찐으로, 2차구간 개통까지 감안한다면 결국 서울 지하철 3호선 이 해에 전구간 개통을 완료[4][5]하였으니 정신승리최종 승리한 셈.

여담으로 이 해에는 후술할 총선의 대반전이나 국제그룹 해체,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을 빼곤 크게 이슈화된 사건이 별로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앞서 나온 서울지하철 3~4호선 동호대교, 동작대교가 개통되고 63빌딩이 여의도 한복판에 완공되었다. 특히 신동아건설이 만든 63빌딩은 종전 한국 최고층 빌딩이던 종로 삼일빌딩을 뛰어넘은 고층빌딩이라 서울 사람들은 물론 멀리 시골이나 산골 등에서 원정방문을 온 사람들까지 이 빌딩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여의도가 교통마비로 몸살을 앓았다는 일설이 있다. 특히 전망대 역할을 하였던 60층을 통해 서울의 전망을 바라볼 때 신기해 하거나 떨어져 죽을 것 같다는 여러가지 잡설들이 나돌기도…

일제의 강제명령으로 폐지되었던 음력 설날이 이 때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휴일로 부활하였다.[6] 그러나 휴일 수도 단 하루뿐이었던데다가 세간에서 봐도 민족의 대명절을 격하해서 지었다는 비난과 반발이 거세기도 했다. 결국 1989년 설날에 가서야 뒤늦게 공식적인 명절로 부활하였고 연휴로도 지정되었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83년부터 시작된 유화 국면과 2.12 총선 당시 신민당의 약진을 틈타 서울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어 '대우자동차 파업'과 대우어패럴 노조 등을 위시한 '구로동맹파업' 등 온갖 학생/노동운동이 일어나면서 전두환 정권은 '학원안정법'을 제정하고자 시도했고,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 '서울대 민추위 사건' 등을 만들어 초강경 태세로 접어들고자 했다. 7~8월에는 호남지역을 강타한 '괴저병' 파동으로 수산업계가 홍역을 맞았다. 경제계에선 1980년대 초반 10대 재벌 중 하나이던 국제그룹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체되는 수난을 겪었다.

한편 당시에는 부족한 인식으로 인해 묻혀졌지만, 한국 의학계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되었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국내 감염 사례가 최초로 보고되면서 분수령을 맞기도 하였다. 6월에는 동성연애 전력이 있었던 53세의 미국인 영어교사가 국내 최초로 AIDS 감염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중동에 파견근무를 나갔던 한국인 남성이 한국인 최초로 감염되었다. 이들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윤방부 교수의 주도로 초기대처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이원영 교수 등이 학술대회를 여는 등, 에이즈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코메디계와 가요계 두 곳에서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다. 먼저 8월, 미국 진출로 대박을 쳐 일본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은 사카모토 큐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로 횡사했다. 그 뒤 9월, 코미디계에서는 더 드리프터즈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8시라구! 전원집합 (8時だョ!全員集合)이 15년 6개월 만에 종영했다. 이 두 사건으로 양계에서는 쇼와라는 시대가 끝나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민간 항공업계에서는 재앙, 흑역사로 꼽는 최악의 해이다. 5월 198명이 사망한 아에로플로트 8381편 공중충돌 사고를 시작으로 6월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329명 사망), 7월 아에로플로트 7425편 추락사고(200명 사망)에 이어서 8월에는 대형사고가 3건이나 되는데 델타 항공 191편 추락 사고(137명 사망),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520명 사망)[7], 영국 항공 투어 28편 화재사고(55명 사망)이며 1985년의 마지막 해 12월에는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사고(256명 사망)로 이어지는 대형 항공 사고가 연이어 터져서 유독 항공 사건사고가 많았던 해로 기록되었다. 9월에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국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 시티에서 세 차례 대지진이 터져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격투게임계에선 세계 최고급 커리어를 걷는 선수들이 이 해에 많이 태어났다. 그들이 자란 시기가 격투게임의 전성기였지만,[8] 그걸 떠나서 봐도 한 장르나 게임에서 가장 재능있는 선수들이 한 해에 몰려있단 점은 꽤 흥미로운 점이다. 그 외에도 이 해에 태어난 유명 축구 선수도 많은 편이다.

UN은 창설 40주년을 맞으며 이 해를 '세계 청소년의 해' 및 '국제연합의 해'로 지정했고, 체신부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885년 한성전보총국 개국을 기준으로 '한국전기통신 100년'을 성대히 맞이하였다. 연세대학교 역시 1885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설립 기준으로 '개교 100주년'을 성대히 맞이했다.

영화계에서는 그간 군사정권 하의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장미희가 주연으로 나온 <깊고 푸른 밤>이 흥행하여 1977년부터 국산 영화 관객동원 1위 영화였던 <겨울여자>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중앙개발의 용인자연농원은 국내 최초로 다크라이드 기구인 지구마을을 10월 2일에 개장하여 향후 30년간 이 놀이공원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했고, 봉명산업은 경북 경주에 '도투락월드'를 열었다.
 
 
 
- 1986년
 
 
 1986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독립기념관 화재
2. 신상옥 부부 북한 탈출
3. 아시안게임 성공적 개최
4. 5.3 인천사태
5. 룸살롱 폭력배 살인사건

6. 개헌 손도 못댄 개헌공방
7.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
8. 국제수지 흑자 시대
9. 전두환 대통령 구주 순방
10. 김일성 피격 사망설
 

 1986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소련 체르노빌 원전 화재
2. 미, 리비아에 테러보복 폭격
3. 미 우주선 챌린저호 폭발
4. AIDS 위협 전세계 확산
5. 필리핀 시민혁명-아키노 집권

6. 미 정부 이란 무기밀매 추문
7. 중국대학생 민주화 시위
8. 국제 유가 하락과 엔화 강세
9. 레이캬비크 미-소 정상회담
10. 고르바초프 블라디보스톡 선언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이 해에는 비극적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고, 국내에서는 최악의 연쇄 살인사건으로 꼽히는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 시작된 해이다.

일본에서는 아케이드 게임 잡지인 <게메스트>가 창간된 해이며, 아케이드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하이스코어 집계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방영된 슈퍼전대 시리즈의 10번째 작품인 초신성 플래시맨은 3년 후, 대한민국에서 1차 전대물 열풍을 불러오게 된다. 필리핀에서는 노란 머리띠를 맨 민중들이 마닐라 거리로 몰려들어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퇴진시켜 '피플 파워'를 보여줬다.

특히 한국 서울에선 아시안게임과 IMF-IBRD총회를 개최하였다.[1] 특히 2년 후인 1988년 같은 도시에서 하계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에 그 당시 세간에서는 1988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성공에 향방을 가릴 시험대의 대회라는 일설도 있다. 그 당시 참가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2년 후 같은 도시에서 열렸던 하계올림픽에도 연이어 참가했다.[2] 다른 한편으로는 전두환 정권의 초강경 민주세력 탄압이 벌어진 해이며 한 해동안 무려 2,500여명이나 되는 학생, 재야인사, 농민, 노동자가 구속되었다.
 
광주시 전라남도에서 분리독립하여 직할시로 승격하였고, 경기도에서는 화성군 반월면 일부 지역 및 시흥군 수암-군자 2면이 통합되어 '안산시'가 되었고, 과천면 역시 시흥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충청남도에선 대천읍이 보령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고, 전라남도에선 송정읍이 광산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고, 금성시가 '나주시'로 변경되었다.

또한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완료된 해이기도 하며, 그래서 당시 언론 매체들은 특집기사, 특집기획 및 쇼 프로 등을 통해 정권 치적으로 선전하는가 하면, 공익광고협의회에서는 '한강 시리즈'를 제작했다. 또 농심 신라면이 처음으로 시판되었던 해이기도 하다. 학교법인 이화학당 산하 학교들은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UN에서는 이 해를 '세계 평화의 해'로 지정했다.
 
 
개헌정국과 한파정국  :  1985년 2.12 총선으로 돌풍을 일으킨 선명 야당 신한민주당은 직선개헌을 위해 1천만 개헌 서명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정당은 현행 헌법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최선의 것이라 주장하여 아예 국회에서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민당 측은 국회 밖으로 뛰쳐나와서라도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노라고 밝혔다.

신민당은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대도시의 개헌 현판식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모처럼의 합법적 공간이 마련되자 그 동안 억눌려 온 국민들의 정치 열기가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대회를 시작으로 3월 23일 부산, 4월 5일 대구, 4월 19일 대전, 5월 3일 인천, 5월 10일 마산, 5월 31일 전주 등의 순서로 계획이 진행되어 갔다.

이후 3월 17일에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김영삼-김대중 양김, 문익환 민통련 의장, 박형규 목사, 이돈명 등이 회동해 신민당과 재야가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이하 민국련)'을 만들어 개헌 투쟁에서 공동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이렇게 개헌 현판식의 대성황과 야당과 재야의 보조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 열기를 더해가자 전두환 씨는 4월 30알 여-야 영수회담에서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건의하면 임기 중에 개헌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정치적 발언으로서 야당을 국회 안으로 끌어들여 국민과의 연대를 차단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게다가 그 개헌안도 내각제 개헌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인천대회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날 인천시민회관 일대에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 등의 운동권 인사들이 모여들어 경찰과 투석전을 다섯 시간이나 벌여 인천에서의 개헌대회는 무산되었다(인천 5.3 운동).

이 사건 이후 야당은 제도권 안에서 집권세력과 타협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운동권 세력에겐 혹독한 탄압이 가해졌다. 대표적으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10.28 건대항쟁, 서노련 사건, ML당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민통련 사무실 폐쇄, 서울개헌대회 봉쇄 등이 있었으며 금강산댐 수공설,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등의 대중조작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정국이 얼어붙는 와중에 12월 24일 신민당에서 7개의 민주화조치를 선행하면 내각제를 받아들이자는 식의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정국이 더 꼬일 대로 꼬여갔다.

여담이지만 이른바 '한파정국'이라는 표현답게 1986년 1~2월은 한파가 찾아왔다. 1월 5일 서울 최저기온 -19.2 °C 최고기온조차 -13.1 °C로 매우 추웠다.
 
 
 
신라면과 매운라면 시판 : 이 해는 그 유명한 농심 신라면이 탄생하여 출시하였던 해였다. 그 동안 라면은 삼양라면을 시작으로 라면시장이 번성했지만 신라면 이전에 매운맛을 내는 라면은 딱히 없었던 편이었는데 이 해 신라면이 출시되면서 라면시장에 변혁을 일으켰다.

초창기에서부터 매운맛을 상징하는 빨간색 바탕과 매울 신(辛)의 서체는 30년이 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포장 디자인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빨강색 바탕과 매울 신자 서체는 유지되고 있다. 이후 신라면과 유사한 매운라면들이 잇따라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신라면의 명맥은 30년이 지나도 이어지는 중이다.
 
 
 
- 1987년
 

 

1987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범양상선 부정사건
2. AIDS환자 첫사망
3. 박종철.이한열 사건
4. 오대양 32명 집단자살
5. 태풍셀마 중부 호우

6. 김만철씨 일가 망명
7. 6.29선언
8. 12.16대통령선거
9. 노사분규
10. KAL기 테러참사

1987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INF협정 체결 
2. 중국 조자양시대 개막
3. 대만의 대중국개방
4. 이란-이라크전
5. 이란-콘트라스캔들

6. 호네커 서독방문
7. 고르바초프의 개혁
8. 일 다케시타내각 출범
9. 달러화.유가 폭락
10. 필리핀정정 불안

 

전년도까지만 해도 위축되던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은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우가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쓰러지면서 다음날 전민항쟁으로 발전했고, 시위에 회의적이던 직장인 등 중산층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하게끔 했다. 6월 29일에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후보가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주요 골자로 한 선언문을 낭독해 민중들 앞에 항복하고 일약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가 원만한 합의를 이룬 헌법 개정이 추진되어 직선제 개헌과 함께 대통령 임기를 단임 5년 고정, 국민 기본권을 대폭 개선한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담아 1987년 국민투표가 93.1%의 찬성율로 통과되어 현재의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제1공화국 이래 지속된 권위주의 체제는 이 해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이듬해에 순조롭세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직선제를 쟁취한  후보 단일화 실패로 전두환 정부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이 해는 김종필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네 후보들은 출신 지역의 지역감정을 고취하였고 이는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한편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을 계기로 노동운동권에선 7월 무노조왕국 현대그룹에 노동조합들이 속속 결성되어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이후 전국 각지로 열기가 파급되어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 공기업, 언론사, 금융업체 등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를 막론하고 노조설립이 활발히 전개됐고, 기존 어용노조에도 민주파가 집권해 민주노조화되기도 했다. 이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불린다. 학생운동권에서는 4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을 먼저 결성하고 8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결성해 서클 중심에서 대중조직(RO) 중심으로 탈바꿈했다. 문예운동권에선 자실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발전되기도 했으며, 여성운동권에선 재야 여성운동단체들이 연합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발족하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선 해운산업 합리화조치로 메이저 해운업체이던 범양상선과 대한선주가 부실화되었고, 특히 범양상선은 사주 박건석 회장이 투신자살하면서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는 전두환 정부와 제5공화국의 마지막 해인 만큼[1] 이외에도 뉴스에서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한다던가[2] 대통령 동정을 뉴스 전면에 보도[3]하는 등 5공화국 시절 특유의 모습이 남아있던 마지막 해이다. 이후 1988년부터는 노태우 대통령의 5공 비리/잔재 청산을 이루어내기 시작한다.

한국전력공사는 1887년 경복궁 건청궁 전구 점등을 기준으로 '한국전기 100주년'을 성대히 기념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매우 의미있는 해인데 TV를 통해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한 국산 애니메이션이 처음 선보인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해는 20세기에서 서로 다른 4개의 숫자가 나오는 마지막 해이며 이후로 2013년이 올 때까지 같은 숫자들이 계속 나왔다. # 또한 가장 최근에 윤6월이 낀 해였으며 이후 윤6월은 2025년에야 다시 나온다.

국제연합은 이 해를 '세계 무주택자의 해'로 지정했다.
 
1987년 출생아 수는 62만명이었다.
 
 
 
- 1988년
 
 
 1988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서울 올림픽 개최…한국 4위
2. 원고시대 환율 600원대로
3. 공산권 교류…북방외교 바람
4. 5공비리-전씨 백담사 은둔
5. 평화적 정권교체…6공 출범
 
6. 육군정보사 오홍근부장 테러
7. 공포의 서울, 탈주범 인질극
8. 국감 부활-청문회정치 개막
9. 4.26총선…'여소야대' 탄생
10. 통일논의 국민적 관심사로
 
 
 1988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8년전쟁 이란-이라크 휴전
2. 소련 고르바초프 정치개혁 단행
3. 소련 아르메니아 대지진 참사
4. 제41대 미대통령에 부시 당선
5. 미-소 INF폐기 비준서 교환

6. PLO 독립선포…중동 새국면
7. 파키스탄, 여총리 부토 집권
8. 네윈 축출…버마 민주화항쟁
9. 미해군함정, 이란여객기 격추
10. 아프간주둔 소련병력 철수 시작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며 희망이 가득했던 1980년대 상징하는 대표적인 연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정부수립 40년 이래 최대의 이벤트였던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2002년과 함께 한국의 상징적인 해이며 이를 계기로 '한강의 기적'은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제적 인지도가 본격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올림픽 당시 오후 수업이 있으면 올림픽 관람에 방해가 된다며 유치원의 수업도 오전 수업만 했다고 한다. 반면 철거민이나 노점상 등 도시빈민들은 올림픽 준비를 위한 '보여주기식' 강제철거와 이주로 한동안 고통을 받아 왔다.

제6공화국 헌법이 효력을 발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의 정치제도가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로 이행한 시기이며, 그동안 '광주사태'로 알려진 1980년 5.18 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4월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로 38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되면서 노태우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해 물러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새로 발족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서 상왕 노릇을 하려 했지만, 후임 노태우의 '5공 색깔 지우기'로 형 전경환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등 5공 비리의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구속됐고, 이에 따라 대국민 사과를 해서 민정당 명예총재 및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에서도 물러났다. 10월 유신 이후 16년 만에 부활한 국정감사에 이어 광주학살, 일해재단 비리, 1980년 언론대학살의 진상 등을 밝히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문회[1]가 치러지게 되었다. 당시 재벌총수, 언론인, 정치가 등 유명 인사들이 출석하여 TV로 생중계되는 등 올림픽에 버금가는 전 국민적 화제를 낳았으며, 국회의원 중에서는 노무현 등이 청문회의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 후 11월, 전두환 부부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이후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 유배를 가게 되었다.

외교 면에선 헝가리 상주대표부 설치를 시초로 공산권 수교를 골자로 한 '북방정책'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사회운동 면에선 학생 운동권은 6.10/8.15 남북학생회담 개최투쟁에 주력했고, 이를 전후해 대학가에선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퍼져갔다. 올림픽 폐막 뒤에는 각 재야단체들이 '전두환-이순자 부부 체포결사대'를 조직해 연희동이나 백담사까지 가서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시위가 벌어지는 곳은 언제나 최루탄 가스로 범벅이 됐다.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 서울랜드가 개장하였으며,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COEX에 무역센터(트레이드 타워)가 완공되었다.

tvN의 인기 드라마인 응답하라 시리즈가 다루는 가장 먼 시대이기도 하다.

쌍팔년도라고 자주 지칭되는 해이다. 하지만 쌍팔년도라는 단어는 원래 서기 1988년이 아닌 단군기원 4288년인 1955년을 뜻하는 단어로, 1988년 이전부터 사용되던 어휘였다. 50년대를 쌍팔년도로 표현했던 70년대 신문기사

1988년은 5공화국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마지막 해이다. 대표적으로 이 해에는 한자가 자주 사용된 사실상 마지막 해이며, 읍니다체가 방송이나 신문에서 자주 사용된 마지막 해이다.[2][3][4]

이 해에는 유난히 농작물이 풍작을 맞이했고, 해외여행 연령도 종전 50세 이상에서 40세 이상으로 확장됐고, 부부동반 여행도 허용되었다.
 
 
6공화국 탄생 :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 후보가 취임하면서 1981년 2월 25일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존재했던 전두환 정부 제5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식 당일에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한 뒤 취임사에서 민족자존의 시대가 열렸다며 타 국가에 심하게 의존하기보다는 자주적으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냉전 시기가 서서히 이완되면서 세계도 상당히 급진적으로 변화된 데 대해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씩씩하게, 그리고 단란하게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딛으며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자고 시민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런가하면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부분은 단연 '북방 외교'이다. 이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 굉장히 중요시했던 외교 정책 중 하나였는데, 노 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과의 우대를 한층 더 강화하는 한편 제3세계와의 우의를 더욱 굳게 하겠다고 말한 바 있으며, 그 동안 대한민국과 교류가 없었던 중국 공산당(중공)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와도 국제 협력의 진로를 넓게 하여 이념과 체제를 넘어 안정과 평화 그리고 공동의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공산권 국가와의 대화, 민족자존 등 다소 진보적인 정책들이 발표되자 시민들은 노태우 정부 출범에 기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시민들 중 대부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독재 정치보다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유민주적인 사회와 행복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대통령이 노력해줬으면 하는 등의 기대감을 표출하였다.

이외에도 세계 여러 국가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의 새 정부 출범을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먼저, 미국 정부는 직접선거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에게 당선을 축하하는 논평을 냈다. 일본 정부는 오부치 게이조 관방 장관을 통해 평가를 냈는데, 오부치 장관은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실현된 것은 역사적인 일로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홍콩[5] 정부는 북방 외교를 천명한 노태우 대통령의 출범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밝혔다.

이 해 2월 25일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이후 1993년 2월 25일 자정을 기해 막을 내렸다.
 
 
제24회 하계 서울 올림픽 개막 : 1988년 9월 17일, 당시 온 국민이 염원하고 기대하던 제24회 서울 올림픽이 마침내 개최되었다. 이 해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은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24년 만에 아시아에서 열린 두 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대한민국이 최초로 개최한 올림픽이다. 또, 대다수의 사람들은 1988년을 떠올리면 서울올림픽이 개최했던 시기로 떠올리기도 한다.

먼저, 1988년 1월 당시 서울올림픽에 참가를 희망한다고 밝힌 국가는 167개국 중 160개국이었다. 지난 1984년 LA 올림픽까지만 해도 미국-소련의 대립과 중공의 도발로 인해 미국과 같은 편에 서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대한민국이 개최하는 1988년 올림픽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 해 1월 중순 즈음에 공산권 국가들이 연이은 개최 희망 입장을 선언하면서 지구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이후 1988년 8월 23일에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채화된 성화 봉송이 세계 여러 국가를 거쳐 8월 28일에 제주도 땅을 밟으면서 대한민국에 도착했으며, 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까지 대한민국 전국 각지를 돌며 올림픽 개막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 1989년
 
 
 
 1989년 조선일보 국내 10대뉴스
 
1. KAL기 트리폴리 참사
2. 토지공개념법 국회통과
3. 임수경양등 밀입국 파동
4. 참교육 시비 전교조 사태
5. 동의대서 경찰 7명 사망

6. 가족법 30년만에 개정
7. 헝가리 등 동구권과 수교
8. 5공 핵심 장세동씨등 구속
9. 5공 연내청산... 전씨 증언
10. 노사분규... 수출 목표 미달
 
 
 1989년 조선일보 국제 10대뉴스
 
1. 중국 천안문 시위 유혈진압
2. 냉전 상징 베를린 장벽 붕괴
3. 미군 2만 파나마 전격 침공
4.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 출범
5. 동구 6국 도미노 정권교체

6.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 사망
7. 미국-소련 몰타 선상 회담
8.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
9. 히로히토 사망... 막내린 소화
10. 아프간-캄보디아 외군 철수
 
 
1980년대의 마지막 해이자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89년은 동유럽 공산정권들이 도미노마냥 붕괴되면서 전세계 뉴스거리가 되었다. 베를린 장벽 철의 장막이 무너졌으며,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에 있던 모든 공산 독재 정권들이 몰락하였다. 대다수 동구권 국가들은 평화적으로 개혁/개방을 쟁취했으나 루마니아만 유혈사태를 겪어가며 뒤늦게 쟁취해냈고, 같은 이유로 꿈과 희망에 가득찼던 당시 중국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피를 흘리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2년전 이미 혁명이 일어났고, 5.3 동의대학교 사태가 있었다.

반면 국내에서는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비롯한 악명높은 연쇄살인이 있었다.[1] 그 유명한 탈옥범 신창원도 1989년 3월에 강도살인에 가담했다. 이때문에 다음해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전년도 12월부터 노태우 대통령이 '법질서 수호'를 시사하는 담화를 한 후 1월 풍산금속 안강공장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선 언제나 경찰력이 투입됐고, 공안사건 수도 갈수록 늘어갔다. 동년 봄에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형성되어 역사를 거꾸로 걷기도 했다. 하반기 들어 5공 청산 요구가 다시 대두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국회로 불러내 증언케 했으나, 전두환 본인이 5.18 광주학살 등 신군부 때 죄과를 상당수 부인해 5공 청산은 실패로 돌아갔다. 교육계에선 진보적인 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하여 1961년 교원노조 해체 후 28년만에 교사 노동조합을 부활시켰으나, 이는 교육계과 일반 대중들 내부에서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켜 정부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대전시 충청남도에서 분리되어 직할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이웃 대덕군을 편입했다. 그리고 경기도에선 군포-의왕 2개 읍이 시흥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고, 시흥군 역시 시로 승격되었다. 또 미금읍 역시 남양주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 동부읍 등 일부 지역이 광주군에서 분리되어 하남시가 출범되기도 했다. 1989년도 대학 입학생부터 교련이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강제 폐지되었던 음력 설날이 이 때부터 공식적으로 국가 공휴일로 부활하였고 북한에서도 음력설이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이 때를 시작으로 그 동안 양력 설날(신정)의 귀성 및 귀경 행렬이 음력 설날로 옮겨졌다. 1999년부터 신정 휴일이 단 하루로 축소됨에 따라, 이 때부터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신정의 고향길 행렬이 완전히 사라졌다.[2] 그리고 여권법 시행령 개정으로 관광 허용 연령기준이 철폐돼 해외여행 자유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쇼와 덴노의 사망으로 60여 년에 걸친 쇼와 시대가 끝나고 아들 아키히토가 황위에 오르면서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연호를 사용하는 일본 특성상 쇼와 64년인 1989년 1월 1일~7일에 태어난 사람들은 마지막 쇼와 시대 출생자들이 된다. 또한 만화계와 가요계에서 데즈카 오사무, 미소라 히바리라는 두 거물을 잃은 해였다. 그리고 일본의 거품경제가 절정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이미 주식시장에서는 버블의 붕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제 노동운동권에서는 1889년 노동절 지정을 기준으로 '메이데이 100주년'이라 하여 크게 기념하는데, 한국의 전국투본은 4.30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를 앞두고 기존의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여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을 청산하고 한국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5월 1일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해 메이데이 쟁취를 크게 알렸다.
 
 
공안정국  : 1988년 여소야대 정국으로 유화 분위기가 형성되던 시절인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고, 같은 달 27일에 열리려던 '남북작가예비회담'이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고 30일에 당시 108일째 계속되던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에 정부가 공권력을 전격 투입하면서 공안정국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4월 3일에는 안기부와 검찰, 경찰, 보안사 합동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조성되면서 대대적인 공안몰이에 들어갔다. 또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지도부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했으며[3] 이로 인해 시인 고은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재오[4] 구속되었다.

공안정국이나 색깔논쟁 시 김대중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김영삼에게도 시련이 닥쳐오는데, 4월 14일에 강원 동해시 보궐선거 후보자 매수와 관련하여 서석재 의원이 구속되면서 야3당 공조체제가 와해돼 버린 것이다. 그리고 6월 27일에 서경원의 밀입북 사건이 밝혀지면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더 큰 피해자가 되었다. 7월 27일에 안기부에서 구인장을 발부하자 김대중은 전 평민당 부총재 문동환과 함께[5] 검찰에 출도해 조사받는 수모를 겪기까지 했다.

이러한 일들이 속속 터지자 민정당은 모처럼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안 약빨도 떨어지고 5공 청산 요구가 되살아나자 결국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해 3당 합당으로 공안통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음력설 부활  : 을미개혁 이후 '구정', '민속의 날'로 불리며 전통 명절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음력 설이 '설날'이라는 정식 명칭을 부여 받고 3일 연휴로 제정되었다.

덧붙여 그 동안 연휴로 지정된 신정은 1990년부터 새해 첫날과 그 다음날만 쉬게 되었고, 1999년부터는 하루만 쉬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해는 1963년과 함께 주말[6]을 제외한 법정공휴일이 총 18일[7]로 역대 가장 많았던 해로 남아있다. 그 반대 사례는 주말을 제외한 법정공휴일이 겨우 6일[8]이었던 2009년.
 
 
 

동유럼 국가들과 수교 ; 19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이 해는 대한민국이 그 동안 친북 및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동유럽 국가들과 잇따라 국교수립을 맺은 해였다. 이 해에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와 수교를 맺었으며 이듬해에도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등과도 수교를 맺었고 드디어는 공산국가의 수장격인 소련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유일하게 동독은 1990년 10월 3일 동서통일이 되면서 동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과 영구적으로 미수교 상태의 나라가 되었다.

1945년 해방 및 남북분단 당시에만 했어도 대한민국은 영국, 프랑스  서유럽 국가와 단독 수교를 맺어왔으며 동유럽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였던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와도 수교하지 않았다. 대신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과 단독수교를 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친북 성향을 가지며 국제사회에서도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전해인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참가하면서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이 동유럽과의 교류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해에 가서야 그 결실을 맺는다.

 

- 1990년

국내 10대 뉴스(조선 일보 뉴스)

1. 3당 통합. 민자당 내분 파동

2. 보안사 민간인 사찰 파문

3. 총리 회담 등 남북 교류 활발

4. 강력 범죄 기승에 '전쟁' 선포

5. 한-소 수교. 노대통령 방소

6. 새로운 민방 서울 방송. 태영 선정

7. 65년 만의 폭우. 한강 범람

8. 지방자치제도 실시.  30년만에 부활 확정

9. 주가폭락 항의 시위 확산

10. 현대 중공업. kbs 노사 분규

 

--국제 뉴스

1. 독일 10월 3일 통일 성취 : 1945년 2차대전에서의 패배로 인한 동서로 나뉘었던 독일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됐다. 서독이 10월3일 오전0시를 기해 동독을 흡수통합하는 형식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새롭게 태어났다. 미-영-불-소등 2차대전 전승4개국은 이 날짜로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에 대한 모든 권리를 공식포기, 기존의 관할권을 독일에 이양했다. 통일을 주도한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12월2일 실시된 전독총선에서 승리, 초대 독일총리가 됐다. 독일통일은 단순히 게르만 민족의 통일차원을 넘어서 유럽내 독일의 위상은 물론, 기존의 국제질서에도 엄청난 변혁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2. 소련. 독재 청산과 외무장관 사임 : 소련 공산당은 1990년 2월 5일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28차 전체회의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과 권력독점을 규정한 헌법 제6조를 폐기했다. 소련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72년간 지속돼온 공산당 일당독재를 청산하는 것이다. 소련 공산당은 이와 함께 다당제를 수용하는 등 일대 체제 변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12월 20일 개최된 인민대표회의에서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 충격을 주었다. 동서 화해를 추구해온 그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보수 강경 세력의 득세를 경고해 소련의 개혁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있음을 보여줬다

3. 페르시아 만 전운. 석유파동 위기 :  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무력침공, 쿠웨이트정부를 전복시킨뒤 양국 합병을 선언했다. 미국은 즉각 군대를 페르시아만에 파병한데 이어 지금까지 미군 25만명을 포함, 40만명의 다국적군을 페르시아만 일대에 배치했다. 서방축은 유엔에서 일련의 대이라크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경제봉쇄를 실행중에 있다.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미국은 이를 배경으로 내년 1월 15일을 이라크의 철수 최종 시한으로 설정해놓고 있다. 쿠웨이트 사태로 유가도 급등, 세계는 제3차 석유위기를 맞게될 상황에 놓여있다. 

4. 이란 지진으로 5만여명 사망

5. 냉전 마감. 파리 헌장 채택

6. 파키스탄 총리 부토 실각

7. 영국 철의 여인. 대처 총리 사임

8. 북한. 일본 조기 수교 합의

9. UR 협상 진통.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진통.. 내년 1월로 연기

10. 폴란드. 바웬사 대통령에 당선 : 노동자 출신

 

이 해의 이슈는 독일통일이라는 사건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동시에 소련의 위성국이던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색채를 벗고 신 정부 출범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로 대거 전향하게 되면서,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50여년 간 지루하게 계속되던 냉전이 사실상[1] 이 해를 마지막으로 종료[2]되었다. 동시에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동독과 서독, 소련이 모두 존재했던 마지막 해이다. 그러나 냉전 동안 이념갈등으로 묻혀 있던 해묵은 과제인 민족주의가 목청을 높이면서 걸프 전쟁,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피바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거품경제를 끝장내기 위해 4월 대출 총량규제를 실시했다. 문제는 이게 버블의 절정에서 시행되는 바람에 잃어버린 10년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주가도 폭락해서 1989년에 4만 포인트에 육박했던 닛케이 지수는 2만엔대로 추락하며 자산시장의 거품이 단 1년만에 붕괴되었다. 아직은 고용시장에 칼바람이 본격적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1992년부터 일본 고용시장에 본격적인 칼바람이 들었기 때문에 단초가 되는 사건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비슷한 시기 한국과 대만에서도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 정치권에선 민정당이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켜 여대야소 체제를 만들었고, 민자당 독주체제 하에 전까지 활발하던 노동운동, 통일운동, 언론민주화 운동에 대해 공권력을 투입해 무차별적으로 짓밟아 '공안통치' 시대를 형성했다. 대표적인 예로 현대중공업 골리앗 농성 진압, KBS 사태 당시 백골단 투입 등이 있다.

하반기엔 민자당 내에서 내각제 개헌 문제로 3개 계파가 싸웠다. 경제/사회 분야에선 '경제활성화종합대책(4.4 조치)'을 발표해 금융실명제를 유보하고 제2금융권 실세금리를 1% 인하시키자, 이에 따라 물가를 비롯해 집세, 전세 등이 폭풍상승해 서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었다.

위와 같은 어지러운 상황 속에 공식 공휴일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우선 양력설이 하루에서 2일 연휴가 되었고(1999년부터 도로 하루로 축소), 1989년부터 3일 연휴가 된 설날 추석이 있었다. 그 외에 1991년 공휴일에서 폐지되고 기념일이 된 국군의 날 한글날은 아직 연휴로 존속했다. 개천절이 추석과 겹치고 월요일이었던 설날이 일요일과 하루 겹치긴 했지만, 휴일로만 1년에 52+19-2=69일이나 쉴 수 있었다. (근로자의 날까지 더하면 70일.) 게다가 원래도 휴일이 많았던 10월이 추석크리로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쉴 수 있었다.[5] 참고로 2013년 이후 현재, 공휴일은 15일 뿐으로, 이 때보다 4일 줄었다.

정부 수립 이래 대한민국이 오랜 적대국이자 북한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공식 수교를 맺었던 해이기도 하다. 후에 소련 러시아 연방으로 출범하여 남북한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언론계에선 KBS 사태와 방송법 날치기 등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에도 불구하고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10년 만에 새 방송사들이 잇달아 개국했는데 서울시가 출범시킨 TBS와 천주교와 불교의 종교방송인 가톨릭평화방송, 불교방송 등이 주인공이다. 또 법적으로 민영방송 설립과 운영도 다시 허용되기 시작하면서 태영건설이 대주주로 나선 SBS가 탄생하게 됐다. 그리고 재야 통일운동권에서도 뜻깊은 해이기도 한데, 남-북-해외 3자연대 민간 통일운동 행사인 '범민족대회' 첫 개최와 범민련 출범으로 대변된다.

여담으로 남자 출생성비가 가장 많은 해이기도 하다. '백말띠의 해' 라 하여 이때 태어나는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근거없는 속설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116.5:100 라는 기록적인 성비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이 해 엄청난 여아 낙태가 이뤄졌다. 더불어 1990년 1~3월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1989년 12월로 일찍 출생신고를 하기도 했으며, 1990년 말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음력 1991년까지 묵혀두다 출생신고를 하는 케이스가 종종 있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많은 편.

독일에게는 이 해가 역사상 최고의 해가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독일민주공화국 독일연방공화국이 통일했음은 물론 보너스로 이 해 개최된 월드컵에서 독일이 우승했기 때문이다.[6] 또한 동서 독일이 통일된 1990년 10월 3일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이전 세대들과는 달리 구 동독과 구 서독 출신이 아닌 통일 독일연방공화국 출신이라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2021년 기준으로 31세 이하에 속하는 독일 젊은이들이 그 대상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팀 버너스리 박사가 고안한 월드 와이드 웹의 약자인 WWW 개념이 완성되어 발표된 해였으며, 이 해 12월에 최초의 웹 페이지를 선보인 후 이듬해부터 일반 공개되어 오늘날의 WWW 기반 인터넷으로 발전된 계기가 되었다.

이 해는 서울에서 가장 많은 강수량을 기록한 해였다. 그러나 10월에는 강수량이 0.0mm로 기상 관측 이래 최초로 강수 일수가 없었다.[7]

이 해에 출생한 사람들은 2020년대에 와서 30대에 접어들었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해당년도의 출생자들을 이대남이나 이대녀의 마지노선으로 쳐주기도 한다. 심지어는 1990년생 출생자들은 벌써부터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가 많다. 또한 1990년생은 2000년대 기준으로 2009년에 대학 입학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대학생이 되었다.

2022년 기준으로는 30대 세대 중 가장 열일하고 피땀을 흘리는 세대가 바로 1990년생 세대이다. 보통 이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제 30대를 훌쩍 넘겼고 신체적으로도 조금씩 퇴보가 되는 동시에 사회에서도 한창 주가를 올리고 가정을 꾸려가는 경우도 있다.

안면도 핵폐기장 유치 파동 : 90년 11월 8일 그 날,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에서는 1만 5천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5일 전인 11월 3일에 과학기술처가 발표한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계획'에 반대하는 집회였다. 이들은 서산경찰서 안면지서와 서장 승용차에 불을 지르고 경찰차를 뒤엎었으며, 경찰관을 연금하는 등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안면도 내 이장단들은 일제히 사퇴를 하였으며, 중고등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자체 집회를 여는 등 반핵 운동에 가담했다. 이 시위로 주민 7명이 구속되었다.

결국 정부는 주민들의 조직적인 반대에 굴복하여 1993년에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백지화한 뒤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을 지역 주민과의 협의 하에 민주적이고 공개적으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같은 투쟁은 1991년 전국 6개 지역 핵폐기장 선정 저지, 1995년 인천 굴업도 핵폐기장 유치 저지, 2005년 부안 핵폐기장 유치 저지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경주 핵폐기장 유치 논쟁에서 보듯, 우리나라 에너지 사정상 핵발전소 및 핵폐기장 건설은 불가피하다는 정부의 입장과 핵 중심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환경단체의 대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 선표 :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자들을 상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치러 근절시키겠다는 특별선언을 하게 된다. 범죄자들과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내용은 전국에 TV로 생중계될 뿐더러 모든 일간지에 톱 기사로 실렸다.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결과, 모든 조직을 뿌리 뽑지는 못했지만 양지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폭력배들은 대부분 소탕되었으며, 살아남은 몇몇 폭력배들도 음지에서만 활동하게 된다.

1990년 11월에는 "새질서 새생활 운동"이라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다가오는 21세기를 위해 변화된 시민의식을 갖자고 강조하였다.

참고로 이 선언을 했던 배경인 1990년은 1989년과 더불어 악명높은 연쇄살인이 많았던 해이다. 특히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1990년을 떠들썩하게 만든 악명높은 연쇄살인이 샛별룸살롱 살인 사건, 노인을 대상으로 한 연쇄 방화살인 사건,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사건이 있었다. 뿐만아니라 6월말 부터 9월초까지 2개월간 무려 3건의 유괴살인도 일어났다.

한국과 소련의 수교 : 1990년은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이 오랜 적국이었던 소련과 국교를 수립한 해였다. 역사적으로 소련은 1945년 북한에 진주한 이래 대한민국을 친미 성향 국가로 보고 미국에 의한 정치적인 배후임을 인지하여 적국으로 규정하여왔다. 대한민국 역시 1945년 해방 및 분단 이후 북한의 배후로 인정하여 소련을 적국으로 여겨왔으며, 1949년에는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을 폐쇄시키고 전 직원을 추방하였다. (주한러시아대사관 참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소련이 직접 군대를 파병하지는 않았지만 북한군에게 소련산 탱크와 무기 및 포탄들을 지급하는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실상 간접적으로 북한을 도운 나라로 인식되어서 휴전 이후 대한민국이 적국으로 규정하여왔다. 당시 소련의 독재자인 이오시프 스탈린 6.25 전쟁의 배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이 영향력으로 북한군은 소련의 지원하에 남침을 하고 3일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1988년에 들어서 서울 올림픽 때 소련이 참가를 하면서 점차 이 때부터 한소간의 오랜 앙금이 풀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소련이 한국 국적기의 소련 영공 통과를 승인하면서 유럽행 한국 국적 비행기들이 그 동안 태평양으로 돌아서 갔던 것을 소련 영공을 통과하는 직선거리로 변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90년 역사적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간의 한소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대한민국과 소련의 역사적인 국교수립이 성사되었다.

동서독 통일 ;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서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동서독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동독과 서독은 베를린 장벽을 쌓으며 경계를 서게 되고 각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친소와 친미로 나뉘어서 각자의 생활과 정치를 누려 왔다.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동서독은 6.25 전쟁과 같은 내전을 겪은 적이 없으며 동서독은 분단 와중에도 하나의 나라이자 민족임을 확인하고 동서 간의 통일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 동서독 올림픽 단일팀 출전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 자유를 열망하는 동독과 하나 된 나라를 열망하는 서독이 서로 마음에 맞게 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에 동독이 완벽하게 자멸하며[8] 독일은 역사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다.

독일의 통일은 21세기인 현재도 남북 분단과 한반도와 한민족에게는 교훈과 숙제를 주었다. 한반도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과 충돌이 있고 6.25 전쟁을 통해서 남북 간 서로의 앙금을 만들었으며 2000년과 2007년, 2018년에 남북정상회담도 있었지만 여전히 남북 간의 긴장과 충돌이 팽팽히 남아 있는 상황이다.

한국이 보는 독일 통일 : 한국의 입장에서는 먼저 통일한 독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으려고 하고 있다. 동서 분단 와중에도 전쟁이나 분쟁을 벌이지도 않고 동서 간에 자유와 하나 된 조국을 열망하였고 동서 간의 통일을 위해 정치적, 행정적,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낸 독일의 통일 사례는 한국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아쉽게도 독일과는 다르게 한반도는 아직도 남북이 분단된 채로 언제 통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리고 지금 한반도에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들도 존재하고 있다. 독일도 한때는 장벽 때문에 이산가족들이 있었지만 통일이 되면서 이들의 비극은 풀어지게 되었지만 한국은 현재 진행형이다.

 

- 1991년

* 국내 10대 뉴스(동아 일보 뉴스)

1.  대학 입시 잇단 부정 사건 발생

2. 수서비리 국회의원 구속 사태 발생

3. 낙동강. 페놀 오염  '물 공포'

4. 지방자치 단체 30년 만에 부활 :  5·16 쿠데타로 중단됐던 풀뿌리 민주주의가 30년만에 부활됐다. 3·23 및 6·20선거로 4천3백3명의 구시군의회의원과 8백 66명의 시도의회의원을 뽑아 본격적인 주민자치의 시대가 다시 열린 셈이다. 일부의원들의 비리와 경험부족, 지역이기주의 팽배등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자치(自治)에 거는 기대는 사뭇 크다.

5. 대구 어린이 실종 등 수난  :  '어린이 수난의 해'로 기록될 만큼 어린이를 상대로 한 범죄가 잇따랐다. 숱한 어린이 대상 범죄는 인간성 상실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도 다섯 어린이의 생사확인 조차 안된채 한해를 넘기게 됐다.

6. 강경대 군 치사사건. 시국 긴장

7.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8. 현대 그룹 정주영씨 탈세 파문 확산

9. 사상 최대 무역수지 적자 기록

10.

cyber

2006-12-12213013691. 대학입시 잇단 부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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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4619489. 사상최대 무역수지 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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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8314372. 수서비리 의원 구속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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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9314166. 강경대군 치사 시국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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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20714755. 대구 어린이 실종등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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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43214048. 현대 정주영씨 탈세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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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56112837.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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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83514723. 낙동강 페놀오염 '물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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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539914611991년 동아일보 국내 10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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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62611222

9. 'UR협상' 막바지 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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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446 239
10 1. 걸프戰… 美주도 질서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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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494 243
9 7. 일본 군사대국화 줄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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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601 223
8 8. 북핵개발 제동 사찰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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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603 225
7 6. 중동평화 이-아랍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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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704 254
6 4. 캄보디아 평화협정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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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741 251
5 2. 남아공 '인종차별'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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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768 228
4 10. 소련제국붕괴 고르비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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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778 249
3 3. 유고내전 발칸반도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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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2905 359
2 5. EC등 세계경제 블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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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3839 228
1 1991년 동아일보 국제 10대뉴스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전년도에 일어난 독일 통일을 기점으로 연쇄적인 동구권 붕괴가 시작되어 이 해에 결국 미국과 세계의 군사 경제, 문화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던 초강대국 소련이 붕괴되었고 공산주의 진영이 와해되었으며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냉전의 종료. 그리고, 일본의 1980년대 거품경제가 꺼지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 바로 그 해이다. 즉, 미국식 자본주의 중심으로 전세계 체제가 돌아가기 시작한 해이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 공산주의 혁명으로 탄생했던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출범하였다. 러시아 연방 출범 이후 출생한 세대들은 소련 출신들이 아닌 러시아 연방 출신들이거나 옛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유럽 및 중앙아시아 독립 국가 출신으로 분리한다.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소련에 속했던 여러 지역이 독립 국가로 탄생했으며 이 때부터 중앙아시아라는 지명이 첫 선을 보였다. 발트 3국도 함께 독립했다.

지난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가 계속 철군하지 않자, 결국 새해 초반,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선전포고를 하고 이라크를 침공한 걸프 전쟁이 일어났다.[1]

동양방송 강제 폐국 이후 11년 만에 또 다른 민영방송사인 SBS가 개국한 해이다.[2] 신방겸영 금지 시절 유일한 민간 지상파 방송사였다.

한반도에서도 이런 바람이 불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4월의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와 7~8월 1991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포르투갈 남북단일팀 공동 출전, 9월 17일 남북한 UN 동시 가입[3], 그리고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 발표까지... 그 남북 관계 활성화를 위해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하여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하였다. 차후에 그 실화를 담아 영화화 되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이 해는 30년 만에 지방 자치제가 부활된 해로서, 3월 26일에 기초의회 의원선거가, 6월 20일에 광역의회 의원선거가 각각 치러졌는데, 당시 수서 비리 사건과 강경대 군 치사 사건 등으로 위기에 몰렸던 집권여당 민주자유당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에 대한 국민들의 싸늘한 시각으로 두 선거에서 모두 압승을 거두었다.[4]

정부는 기업의 생산성을 늘리기 위해 국군의 날  한글날을 이 해부터 공휴일에서 제외했는데, 제외 당시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일할 시간만 늘린다"며 불만을 표했다만, 한글날은 이후 2013년에 다시 공휴일로 부활했다. 또 해외 투자 기업 연수생 제도 도입으로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흉악 범죄 사건이 연이어 터진 때인데,[5] 3대 영구 미제 사건 중 두 사건인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서커스소녀 심주희 감금학대 사건,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 등이 터진 해이기도 하다. 심지어 낙동강에서 페놀오염 사태가 터져 국민들에게 환경오염 문제를 각성시키기도 했다.

MBC가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 중 한 해인데, 대표적으로 초대형 히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여명의 눈동자 이경규의 상징이자, 당시 큰 화제를 불러모아 예능의 대표적인 포맷 중 하나가 된 몰래카메라 MBC에서 방영을 시작했다.

해외 게임계에서는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나와서, 대전액션게임 붐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이 해 문명 1이 나와서 문명하시는 분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명 1이 나온 날짜는 불명.

한편 문화부[6]에서는 이 해를 연극의 해로 지정하였다.[7]

세계 고전음악계에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서거 200주기를 성대하게 맞이하면서 음반, 책, 관광상품 등 관련 수익상품들이 날개 돋힌 듯 팔려 매상을 올렸으며,[8] 록 장르에서 기념비적인 명반이 쏟아져나온 해이다. 너바나의 <Nevermind>, 건즈 앤 로지스의 <Use Your Illusion>, 펄 잼의 <Ten>, 메탈리카의 <Metallica>, U2의 <Achtung Baby>,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Blood Sugar Sex Magik>,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Loveless>, 슬린트의 <Spiderland>가 모두 이 해에 나왔다! 반대로 록 역사상 최고의 프런트맨 중 하나로 평가받는  프레디 머큐리 에이즈로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출산율이 올랐던 시대[9]의 산물이자 1960년대생의 직계자식세대인 에코붐세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이다. 이때부터 산아제한 정책이 다소 완화된 것의 영향으로 출생아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직전년이였던 1990년이 경오년이였는데 백말띠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라는 근거없는 속설 때문인지 출생신고를 늦게 한다든지의 편법을 쓴 것의 영향도 있었다.[10][11]

한편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1기 신도시 물량공급이 본격적으로 확대됨에 따라서 198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부동산 열풍이 잠잠해졌다.

이 해 이후 태어난 정신건강의학과 사유의 사회복무요원 기초군사훈련을 받지 않는다.

이 해는 대칭수의 해이며 다음 대칭수 해는 2002년이다.

- 첫 민영 방송 송출  지난 1990년, 당시 최병렬 공보처 장관이 민영방송의 송출을 허가하면서 서울방송이 설립되어 이 해 12월에 첫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때문에 서울과 경기 그리고 인천 등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서는 SBS의 시청이 가능해졌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이 해 9월 17일[12], 남한과 북한이 서로 비방을 자제하고, 상호 간의 존중한다는 합의 아래 UN에 동시 가입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드디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경색되었던 남북관계에도 화해의 물꼬가 트이면서 많은 국민들이 변화된 시대를 기대하였다// 

소련 연방 해체  이 해 12월, 미국과 수십 년째 대립하던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재탄생했다. 때문에 소련의 해체에 의해 냉전 시기는 완전히 종료되었으며, 기존 소련에 속해 있던 일부 지역은 소련에서 탈퇴해 새로운 국가로 탄생했다.

 

- 1992년

5. 경제 12년래 최저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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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029141106. 한 전군수 관권선거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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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03412994. 한­중수교 노 대통령 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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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05712882. 남북협력합의서 발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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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06014077. 헌정최초 중립내각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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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09613361. 부천 서울신학대에서 문제지를 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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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3716758. 시한부 종말론 휴거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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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9613243. 황영조 올림픽마라톤 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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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24912839. 김영삼후보 대통령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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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357137210. 김대중씨 정계은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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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C 10국 유럽통합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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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097139109. 독일 신나치 외국인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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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3713293. 지구촌비상… 리우 환경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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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3713686. 클린턴 미국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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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5413771. 유고내전 최악인종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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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6217468. 러 보혁갈등 장래불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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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16413254. 일 자위대 전후 첫 해외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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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22113645. 중국 개혁­개방 가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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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228114332. LA 흑인폭동 교민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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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3603117517. 소말리아 기아… 30만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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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5115129

대한민국에서 1984년 이후 출생아 수가 가장 많은 해(약 73만 명)였으며, 이 다음해(1993년)부터 출생아 수가 점점 줄기 시작해서 본격적인 저출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해 3월[1]부터 이듬해(1993년) 2월[2]까지 태어난 학생들이 1990년대에 초등학교에 재학하는 마지막 세대가 된다. 또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치러진 마지막 해가 된다. 이듬해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 체제로 대학입시가 개편된다. 중간중간 자잘한 변동은 있지만 기본 틀은 2010년대 중반까지 계속 유지되어오고 있다.

한국 정치권에선 민자당은 14대 총선에서 원내1당을 차지하긴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해 2년 만에 '여소야대' 시대가 다시 도래했고, 하반기 들어 헌정사상 최초로 중립내각이 수립되고 12월 대선에선 민자당 후보 김영삼이 민주당 후보 김대중을 꺾어 '최초의 민간후보 당선'을 이뤄냈다. 경제 분야에선 주식시장을 외국인들에게 개방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사회 분야에선 전년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최초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 및 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수요집회가 시작되면서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가 쟁점화됐고, UN 리우환경회의를 전후해 전 국민들이 '환경 보호'를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또한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막을 올린 군사정권이 31년만에 막을 내린 해이기도 하다.

외교 분야에선 - 양국이 공식 수교한 해이다. 반대로 대만은 마지막 대국(大國) 수교국인 대한민국과 단교하여 상주 대사관까지 철수시켰다.[3] 전년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로 호전될 뻔했던 남북관계는 미국의 북핵문제 제기로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역사학계에선 조선 건국 600주년을 기념하기도 했다.

1991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한 데 이어, 1992년 초에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한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 끝에 독립한다. 이에 고무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또한 1992년 2월 초 독립을 선언하나, 이에 반발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가 스릅스카 공화국을 건국하고,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스릅스카 공화국을 지원하며 4월 1일,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한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도중 일어난 최대 규모의 대학살이 벌어져 극단적 민족주의의 경각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반대편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자헤딘 반정부군 세력들이 1991년 최대 지원국이던 소련의 해체로 지원국마저 잃어버린 아프가니스탄의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태국 민중들은 전년도에 쿠데타로 집권한 수친다 총리의 당선에 반발해 처절한 희생으로 군부정권에 저항해 60년 군부체제를 끝장냈다.

한편 UN은 이 해를 '세계 우주의 해'로[4],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의 해로 각각 지정하였다. 스페인에선 그 해에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세비야 엑스포,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이라는 겹경사가 터졌다.

동계올림픽과 하계올림픽이 같은 해에 열린 마지막 해이자 대한민국 올림픽 사에 있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긴 해이다. 우선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김윤만이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은메달을 따내면서 대한민국은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이후 최초로 메달을 획득하게 되었다. 같은 대회에서 김기훈은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한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직전 대회 개최국이자 종합 4위를 기록했던 대한민국은 이 대회에서 종합 7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지난 대회 성적이 결코 홈그라운드의 유리함만이 아님을 증명하며 선전했다. 특히 개막 후 대회 첫 금메달(사격, 여갑순)과 마지막 금메달(마라톤, 황영조)을 따내는 진기록을 달성했으며,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은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달고 획득한 마라톤 첫 금메달이었다.[5]

야구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는 최고의 해로 기억되는데 남두오성이라는 별명의 소총타선과 윤학길, 염종석을 앞세워 두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냈기 때문. 문제는 그러고 현재까지 우승을 못하고 있다. 우승은 고사하고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도 1999년이다.(...) 한편 한국시리즈 상대였던 빙그레 이글스는 페넌트레이스에서 무시무시한 활약을 하고도 롯데 돌풍에 안타깝게 또 한 번 우승을 놓쳤다. 둘 다 긴 암흑기를 겪었다는 점에서 팬들에게는 상당한 추억으로 남는 해.

축구계로 넘어가자면 이해에는 2020년 현재 주목받는 굉장히 많은 신성들이 태어난 해였다. 당장 하단의 탄생 항목에는 네이마르 주니오르, 손흥민, 황의조뿐이지만 이 외에도 이스코 알라르콘, 마리오 괴체, 다비드 알라바, 티보 쿠르투아, 스테판 엘 샤라위, 이케르 무니아인, 베른트 레노, 필리페 쿠티뉴, 크리스티안 에릭센, 에릭 라멜라, 루카스 모우라, 코케, 알바로 모라타, 존조 셸비, 마르크안드레 테어슈테겐, 모하메드 살라, 알리송 베케르 (...) 등이 있다. 헉헉, 많다[6] 상술한 손흥민과 황의조를 포함해서 한국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인 이재성, 김진수 역시 1992년생이다. 나름대로 한국 축구의 황금 세대라고 볼 수 있겠다.[7]

연예계에서는 前 원더걸스 소희, 선미, 前 포미닛 현아, EXID 하니, 걸스데이 유라, 마마무 문별, 前 애프터스쿨 리지, AOA 유나, 브레이브걸스 은지 등이 있다.

게임계에서는 이영호, 김대엽, 어윤수, 정윤종, 주성욱, 김준호 등과 같은 프로게이머 신성들이 가장 많이 태어난 해이다. 지난 해에 출시된 스트리트 파이터 2가 1992년 게임계에서는 가히 스트리트 파이터의 해라고 해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인기의 절정에 이르러 첫번째 버전업판이 나왔으며, 이 해를 기점으로 SNK의 용호의 권을 선두로, 동 회사의 아랑전설 2, ADK의 월드 히어로즈, 미국에서는 모탈 컴뱃이 나오는 등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본격적인 기틀을 잡은 대전 액션 게임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90년대를 풍미한 격투게임 장르 붐이 터진해다.

주말 공휴일이 7일이나 되었다. 삼일절, 식목일, 부처님오신날(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고,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은 토요일이었다. 추석은 9월 10일(목)~12일(토)로 추석 다음날이 주말과 겹쳤지만, 설날은 2월 3일(월)~5일(수)로 주말과 이어져 있다.[8]

- 제7차 경제 사회 발전 및 제3차 국토개발 계획 공포,  

- LA폭동 발생

- IAEA의 북한 핵 재처리 능력 보유 확인

- 한.중 교류시대 개막 ; 한중 수교

- 마지막 학력고사 시행

-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및 신승훈의 인기와 열풍

 

- 1993년

1993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자 1990년대의 4번째 해다. 따라서 주말과 겹치는 공휴일이 7일이나 됐다.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은 일요일, 제헌절과 성탄절은 토요일이었다. 설날은 1월 22일(금)~24일(일)이었다. 다행히 추석은 9월 29일(수)~10월 1일(금)으로 주말과 겹치지 않았다.

2. 기후[편집]

이 해는 연초에는 평년보다 조금 높았으나 전국적으로 저온현상이 지속되어 전국 연평균기온이 12도를 밑돌았다. 1993년을 마지막으로 전국 연평균기온이 12도 미만을 기록한 해는 없다. 4월부터 저온현상이 지속되어서 4월 10일에 눈이 내렸다. 이후에도 5월 말, 9월 초를 빼면 10월까지 평년보다 추웠는데 특히 여름에는 폭염이 전혀 없었고 7~8월 평균기온은 22~23도까지 내려가 한여름은 커녕 6월과 9월 수준의 날씨였다. 하지만 다음 해 여름은 최악의 폭염이 찾아왔다. 10월에도 2002년, 2018년 10월[2]처럼 쌀쌀했다. 이 이상 저온은 11월이 되자 풀리고 고온현상이 일어났다. 이후 1993~1994년 겨울은 몇번의 반짝추위를 빼고는 따뜻했다.

서울과 전국의 월평균기온 통계는 다음과 같았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서울 월평균기온(°C)
-1.9
1.0
5.8
10.6
18.2
21.3
23.3
23.2
21.2
13.4
8.5
-0.2
11.9

3. '노태우 정부' 마지막 해 & '문민정부' 원년[편집]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표방하여 취임 초기부터 본인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해 부패 공직자들을 대거 숙정했고,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시행, 안기부 개혁 등 속 시원한 개혁에 착수하여 국민들의 박수를 한몸에 받았다. 이로써 지지율이 90%대를 돌파하여 서태지와 아이들, 최진실을 제쳐 인기스타 1등으로 격상했다. 한편 김영삼의 라이벌인 김대중 당시 민주당 고문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가게 되어 이기택이 새 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의 일극 체제가 시작된 해이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의 지도자가 바뀐 해이다. 먼저, 대한민국에서는 2월 25일 노태우  김영삼으로 바뀌었다. 미국에서는 1월 20일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8월 10일 미야자와 기이치  호소카와 모리히로로 바뀌었다. 중국에서는 3월 27일 양상쿤  장쩌민으로 바뀌었다.

나름대로 흥했던 대전 엑스포가 개최된 해다. 그리고 이해 출생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학교 처음 들어간 2012년 여수 엑스포를 즐기게 되었다.

위와 같은 공적 뒤엔  분야를 통틀어 교통수단 대형 참사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등, 70년대~80년대 압축 경제성장의 부작용들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3]

그리고, 세계 경제통합의 상징인 유럽연합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해도 이 해이다.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발효되면서 완전경제통합 단계로서 단일경제블록이 출범한 것.

이 해는 이전까지 시행되던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기 시작한 첫 해이다. 한편 학생 운동권에서는 그동안 학생운동을 선도했던 전대협이 해체되고 한총련이 출범하여 학생운동의 새 역사를 연 해이다.

해외에선 부패정권이나 내각이 3번 연달아 낙선으로 무너진 해이기도 한데, 프랑스에선 피에르 베레고부아 총리가 비리 혐의로 낙선 후 자살했고, 이탈리아에선 줄리아노 아마토 총리가 부패스캔들에 연루되어 퇴진했다. 또 일본에서는 38년간 장기집권을 일삼은 자민당 내각이 총선 패배로 무너졌다. 반면 체코슬로바키아가 1993년 1월 1일자로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캐나다에서는 한 해에 총리가 3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1993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브라이언 멀로니, 6월부터 10월까지는 킴 캠벨[4], 11월 이후는 장 크레티앵.

경제/사회분야에서는 보사부가 약국에서 한약을 취급토록 허용하면서 한의사와 약사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쌀개방 반대를 약속한 당시 정부가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개방을 허용하면서 외국산 쌀의 국내 수입이 허용되었던 해였다. 국내 농가와 농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굴욕으로 남았던 편이다.

한편 국제연합에서는 이 해를 '세계 원주민의 해'로,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의 해로 각각 지정하였다.

한편, 이 해 11월에는 신세계백화점 이마트가 서울 창동에 개점하면서 대형 할인점을 처음으로 선보였고, 이후 다른 기업이나 외국 회사들에 의해 우후죽순으로 SSM(대형할인마트)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1기 신도시 입주가 가장 활발하던 때이기도 하다.[5]

이들 또한 1994년 문서에도 있듯이 1993년 7월 2일생부터 1993년 12월 31일생은 자기 생일이 아닌 2013년 7월 1일 일제히 성년이 되었다.[6]

이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초, 중, 고 학창 시절 내내 토요일에도 등교를 했었다. 이들이 졸업한 2012년부터 토요휴업제가 도입되었다. 다만 방학은 길었던 편이었다.

컴퓨터그래픽스 계열 종사자들에겐 일종의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하다. , 버추어 파이터, 쥬라기 공원, 영구와 공룡 쭈쭈[7]가 각각 출시 및 개봉하면서 각 분야에서 비주얼 쇼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 많이 출연했었는데 루나 로이킴은 가왕까지 등극했었다. 후에 손승연 한동근 가왕에 등극한다.

바로 이 해 하반기에 들어서서 최초로 슈퍼전대 시리즈의 리메이크 파워레인저 시리즈 마이티 몰핀 파워레인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나름의 장대한 시대와 스케일 및 열풍 등을 아동층으로부터 줄곧 지속해가는 작품이 세상 앞에 그 첫 베일을 풀게 되었다.[8]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윤3월이 들었던 해다. 4월 22일부터 5월 20일까지가 윤3월이었다.

특유의 3X3 자국을 남기는 일본산 경피용 BCG 주사가 9월 경 국내에 최초 도입되었다. 다만 초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고 물량도 많이 없어서 처음부터 접종이 확산되지는 않았으며 1994~1995년 이후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해에는 픽사나 드림웍스가 나오기 전이었고 디즈니는 이전 해에 알라딘을 내놓고 라이온 킹은 다음 해에 내놓으면서 전체적으로 드래곤볼, 슬램덩크, 마이트가인을 앞세운 일본 애니메이션이 미국 애니메이션에 우위를 가져갔었다.

3.1. 한총련 출범, 90년대 학생운동의 등장[편집]

1987년부터 5년간 학생운동을 선도하던 전대협의 후신으로 1993년 4월 25일에 전북 전주에서 한총련 출범을 알렸다. 이후 5월 28일, 고려대 안암캠에서 전국 187개 대학생 6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한총련 출범식을 열어 한총련은 첫 걸음을 내딛었다.

초대 의장으로 김재용 한양대 총학생회장을 앉힌 한총련은 이날 출범선언문에서 “외세와 독재에 맞선 전대협의 투쟁 정신을 계승해 자주․민주․통일을 향한 백만학도의 조직으로 역사와 민족 앞에 출범을 선포한다”고 밝히고 “한총련은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로 학원의 자주화 및 조국과 민족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한총련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출범 때부터 남북학생 전화통화 회담을 계기로 공안당국의 수사대상이 됐고, 6월 12일 '조국의 평화실현과 자매결연을 위한 예비회담'을 개최하기 위해 연세대 도서관에서 판문점으로 향하려다 경찰에 의해 저지당해 일부 학생들은 연신내 등지에서 과격 시위를 벌였다. 같은 시기 불광동에 있었던 학생시위를 진압하러 간 김춘도 순경이 학생 시위대에게 몽둥이 등을 맞아 순직하면서 한총련에 대한 정부의 부정적 시선은 이때부터 적용되었다.

3.2. 복고 열풍이 유행했던 해[편집]

이 해는 사회문화적으로 복고 열풍과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높았던 때라 서편제와 같은 영화나 비락식혜 같은 전통음료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던 시기였다. 구한말 시절부터 유입된 미국과 유럽풍 서구 문화에 빠져든 당시 젊은이들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고리타분하거나 캐캐묵은 구시대 유물이라며 업신여기고 경시하는 성향이 짙은 바람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옹호론이 득세하여 이에 맞춰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한 영화나 음료들이 등장하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이 부분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는데 판소리와 진도 아리랑을 소재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경시하고 업신여겨왔던 젊은이들에게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으며 판소리에 대한 인식도 이 영화를 통해서 점차 나아지기도 하였다. 영화도 흥행에 성공하였고 이를 통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구식이라고 경시해왔던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하였다.

이 해에 나왔던 비락식혜와 수정과 캔음료는 캔음료 시장의 역사를 바꾸게 만들었다. 식혜나 수정과하면 보통 명절 때나 즐겨마시는 음료로 인식되었던지라 식혜와 수정과를 콜라나 사이다처럼 캔으로 마실 수 있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신선한 충격이자 이변이었다. 지금은 식혜나 수정과 캔음료가 나온지도 오래되었고 이제는 흔해진 현상이라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 당시까지만 했어도 식혜와 수정과 캔음료가 나왔다거나 그것을 캔으로 일상에서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자 이변이면서 그 당시 세간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흔히 콜라, 사이다, 주스 위주로만 캔음료 시장이 장악을 했던 점도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도 가히 이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명절 때만 수제로 먹었던 식혜와 수정과를 캔이나 파우치 등으로 일상에서도 마실 수 있게 됨으로서 음료시장에 변혁을 일으켰고 비락의 영향으로 롯데, 해태 등도 잇따라 유사 식혜 캔음료를 출시하였다.
 
 
 
- 1994년
 
 
한국 가요계에서는 김건모, 룰라, 투투 등을 중심으로 레게풍 음악이 유행을 탔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핑계>, <칵테일 사랑>, <백일째 만남>, <일과 이분의 일>이 대표적이었다.[1] 하반기엔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수록곡 <교실 이데아>의 '피가 모자라' 사건으로 음악의 악마주의 논란 및 백워드 마스킹이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 대중음악계에선 이스트 코스트의 슈퍼루키 노토리어스 B.I.G.와 아웃캐스트, 나스, 본 석스 앤 하모니가 배출됐고, 커먼, 마스터 P, 그레이브디가즈[2], 스카페이스, 워런 G, 피트 락&CL스무스, 메소드 맨, UGK 등 중진들도 걸작급 앨범을 무수히 내 1988년과 더불어 '힙합 역사상 최고의 해'로 이름났으며, 특히 애틀랜타에 기반을 둔 듀오 아웃캐스트는 '남부 힙합의 반란'이라고 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이 해에 대원은 어린이 만화 잡지 팡팡과 청년 만화잡지 영 챔프, 서울문화사는 영 점프 등을 출간하였다. 이 와중에 동아출판사는 두산그룹의 재력을 빌려 추첨을 통해 히말라야 산맥으로 보내준다는 과감한 마케팅을 선보인 <베이스 캠프>라는 만화 잡지를 창간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세월이 흘러 팡팡은 2006년에, 영 점프는 2003년에 폐간되면서 현재 남은 잡지는 영 챔프 뿐. 그리고 소년중앙이 이 해 9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19년 뒤 주간신문 형식으로 부활하기는 하지만.)

또 전자업계에선 CD플레이어 내장 PC 등 멀티미디어 기종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DRAM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삼성전자의 주가가 오르며 코스피지수(당시 종합주가지수)가 1138.75포인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기록은 2005년이 되어서야 깨지게 된다. IT 업계에서도 한국통신과 데이콤이 상용 인터넷 서비스를 처음 실시해 대변혁을 일으켰다.

서울특별시 1394년 태조 이성계 새로 세운 나라 도읍지 한양을 결정한 이후 600주년을 맞이해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행사를 1년 내내 성대하게 열었는데 특히 남산골 한옥마을 남쪽 공간에 '서울천년 문물주머니'라는 명칭의 타임캡슐을 묻었다. 이 타임캡슐에는 1994년 당시 서울시민들이 사용하던 생활필수품부터 각종 행정 서류, 학교 교과서, 신문, 의복, 곡식 씨앗, 무선호출기 등 1994년 서울의 현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600개의 물건을 담았다. 타임캡슐은 서울 정도 1000년을 맞이하는 2394년에 개봉 예정인데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개봉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2014년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10월 21일에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부모를 흉기로 찌르고 불태워 죽인 패륜아 박한상, 밤무대 악사와 중소기업 사장 부부를 집단으로 살해한 지존파 등 굵직한 살인마들의 실체가 드러나는가 하면, 경기도 부천과 인천에서 세무공무원들이 세금을 도둑질한 정황이 드러나는 등 충격적인 사건 또한 많았다. 게다가 그해 남북한의 전쟁위기와 박홍 신부의 '주사파' 발언으로 '신공안정국'이 형성되면서 <태백산맥>과 <한국사회의 이해>의 이적성 논란 파문, 청소년단체 '샘' 사건 등의 온갖 공안관련 사건이 줄줄이 터져나와 과거 반공 군사독재 시기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콘솔게임계에서는 수많은 5세대 게임기들이 이해에 발매되어 슈퍼패미컴의 전성기 및 4세대 콘솔 시대를 끝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3DO, 네오지오 CD, 세가 새턴, 플레이스테이션, PC-FX가 차례로 발매되었다.

교통과 건설면에 있어서는 격랑과 수난의 해이기도 하였는데 이해 6월 당시 전국철도노조(철도청)와 서울지하철공사 노조 그리고 부산 지하철 노조가 전면 파업을 하게 되었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는 시민들이 철도와 지하철 이용에 불편을 겪었지만 파업을 지지하는 시민들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10월 성수대교 붕괴까지 이어지면서 수난의 시기를 겪었다. 또한 본격적인 서울의 지하철 체계가 1기 지하철 노선의 연장과 5,6,7,8호선 등 신설 노선의 건설을 골자로 하는 2기 지하철 계획이 실행됨에 따라 그 수행 과정에 있어서 제 2의 지하철 공사 설립 필요에 따라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가 설립된다.

그 해 여름 라이온 킹 포레스트 검프가 개봉한 해이며,[3] 마스크, 트루 라이즈, 스피드에 이어 겨울에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덤 앤 더머 할리우드의 유명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줄줄이 나온 해이기도 하다. 그 덕에 미국에서만 역대 한 해 흥행 수입과 관객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2년 뒤에 깼다. 어차피 그렇긴 하지만…

LG 트윈스 팬에게 이해는 최고의 해로 기억되는데, 이광환 감독의 자율형 '신바람 야구'와 신인 3인방(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활약을 앞세워 압도적인 전력으로 우승을 했던 해였기 때문. 1990년에 이어 두 번째 우승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지막 우승이다. 농구계에선 문경은과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 등을 주축으로 한 연세대 농구부가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상무를 꺾어 처음으로 트로피를 들어올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거기에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 열풍과 맞물려 큰 주목을 받았고, 농구장을 찾아오는 여학생들도 급증했다. 이에 전희철과 김병철 등을 앞세운 라이벌 고려대 농구부는 더욱 분투해 동년도 MBC배와 대학농구연맹전 1~2차전, 연고전에서 연세대의 아성을 무너뜨려 제패했다.

미국 MLB는 선수노조 파업으로 인해 사실상 한 해 시즌을 통째로 날렸으며, 90년만에 월드시리즈도 열리지 못해서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뉴욕 양키스가 피를 봤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사용하는 NBA의 뉴욕 닉스와 NHL의 뉴욕 레인저스가 동시에 결승전 무대에 오른 해이기도 하다. 마지막 우승으로부터 닉스는 19년(1973), 레인저스는 무려 54년(1940)이 흐른 해였던지라 그 어떤 때보다도 뉴욕 스포츠팬들의 우승갈증이 절박했었다.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닉스는 마이클 조던이 없는 틈을 타 리그판을 씹어먹고 파이널까지 도달했으나, 결국 하킴 올라주원 휴스턴 로켓츠에 패퇴하고 말았다. 반면 마크 메시어가 이끄는 레인저스는 밴쿠버 커넉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에서 승리하며 네 번째 스탠리컵을 품에 안았다. 반면 밴쿠버 시민들에게는 불행과 분노의 해가 되었으며, 시내에선 폭동까지 터지기도 했다.

또 이해에 태어난 대만 남성들은(즉, 2012년에 만 18세가 되는 시민) 군 복무가 1년에서 기초 군사 훈련 4개월로 줄어들게 되었다. 1993년생 대만인은 억울했을 듯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이해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당시 시행 중이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UN은 이 해를 '세계 가정의 해'로, 한국관광공사는 '한국 방문의 해', 문화체육부에서는 국악의 해로 각각 지정하였다. 서울특별시 측은 1394년 한양 천도를 기준으로 '정도 600년', 농민운동/역사학계에선 '동학농민운동 100년', 전통문화계에선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30주년'을 각각 성대히 맞이하였다.

1992년부터 미국측이 제기해 크게 불거져온 북핵문제는 1993년 북한의 NPT 탈퇴선언 후, 미국측이 영변군 핵 시설을 폭격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한 데다 한국 정부 역시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남북한 간 전쟁위기가 왔고, 국민들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생필품을 비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지미 카터의 방북과 김일성의 사망으로 제네바 합의에 도달하여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매우 안 좋게도 내전, 전쟁범죄 제노사이드의 해였다.상반기에는 르완다 내전 보스니아 내전이 일어났으며, 하반기 12월 11일부터는 러시아 공군 그로즈니 폭격을 가하여 체첸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해 12월 31일 연말에는 러시아 지상군이 T-80 BMP-2 장갑차를 앞세워 그로즈니 내로 들어가다 엄청난 피해를 보는 등 정말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며 난민들이 각지에서 쏟아져 나온 해였다. 위와 같은 참극은 냉전 후 기승을 다시 부린 '극단적 민족주의'가 빚어온 것이다.

배우 짐 캐리에게는 배우인생의 행운의 해이기도 했다. 이 해 개봉한 영화 에이스 벤츄라 - 마스크 - 덤 앤 더머가 모두 대히트하면서 짐 캐리는 무명시절의 설움을 딛고 스타로 도약했다. 이 3연속 장외홈런이 얼마나 대박이었는지 영화계에서 94년은 지금도 '짐 캐리의 해'라고 불릴 정도.

주말 공휴일은 새해 첫날(토), 제헌절(일), 성탄절(일)뿐이었다. 게다가 1989년 음력 설과 추석이 3일 연휴로 지정된 후 처음으로 음력 공휴일이 모두 주말과 겹치지 않았다. 설날은 2월 9일(수)~11일(금)이었고 바로 뒤에 주말이 있었다. 추석은 9월 19일(월)~21일(수)인 데다가 바로 앞에 주말이 있었다. 어린이날은 목요일, 석가탄신일은 5월 18일(수)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대체공휴일이 시행됐더라도 대체공휴일이 적용되는 휴일은 없었을 것이다.

3. 기후[편집]

3.1. 1994년 폭염[편집]

이해 여름에는 끔찍한 혹서(酷暑)와 열대야가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지난 해(1993년) 이상 저온으로 오지 않았던 더위가 이해에 몰려왔다고 말하기도 한다.[4] 참고로 이 폭염 동안 전국적으로 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5] 북한에서 김일성이 돌연 급사한 것이 이 폭염의 영향이라는 진단도 진지하게 나온다.

2016년에는 94년 8월을 뛰어넘는 폭염이 대한민국을 강타했으나 여전히 평균치로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드디어는 (1994년 시점으로) 24년 후인 2018년, 이 폭염을 뛰어넘는 폭염이 94년 폭염의 기록을 대부분 갈아치우게 된다.

하지만 중년~고령층이 손 꼽기로는 아직도 1994년의 악명이 더 높은데, 당시에는 에어컨 같은 냉방시설이 상당한 고가품이었기에 대부분 부채 선풍기로 버텨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8년 폭염은 습도가 낮았지만 1994년 당시에는 습도도 높았던 탓도 크다. 아직도 7월의 폭염일수, 열대야일수는 아직도 1994년이 1위다. 1994년이 7월 폭염이었다면 2018년은 8월 폭염이라 할 수 있다.[6]

물론 여름만 뜨겁지는 않았다. 연평균기온도 2010년대 초반까지는 아예 순위권이였다. 전년도 11월부터 이상 저온이 끝나고 기온이 오락가락하다가 1994년으로 바뀐 1~2월은 이상 고온을 보였다. 1994년 3월에는 꽃샘추위가 와서 1994년 중 유일한 저온을 보였지만 4월에는 초이상 고온이 왔다. 당시 거리에는 4월 초순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 역대급 폭염의 전조였다고나 할까. 5~6월에는 평년보다 크게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온현상이 잦았다. 7~8월은 앞서 말했듯이 매우 더웠다.[7] 이후 9~10월에는 큰 더위는 없었으나 여전히 평년보다 조금 높았다.[8] 끝내 1994년은 11월부터 이상 고온 현상이 복귀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물론 1994년 전에도 믿기지 않는 폭염기록이 많았다. 이는 대부분 1930년대 후반 ~ 194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며[9] 대표적으로 1939년 폭염, 1942-1943년 폭염이 있었으며 그 뒤로 1945년, 1949년 여름이 그 뒤를 이었다.

서울과 전국의 월평균기온 통계는 다음과 같았다.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서울 월평균기온(°C)
-0.9
0.8
4.0
15.2
17.9
22.8
28.5
27.6
21.0
15.2
9.3
1.1
13.5

4. 주요 이슈[편집]

4.1. 문민정부 추락의 시작, 199[편집]

1993년에 터졌던 대형사고 러시는 1994년에 가서도 진행되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지존파 박한상의 엽기/반인륜적 살인사건, 대한항공 2033편 활주로 이탈 사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등이 이어졌으며, 부천과 인천 등지에서 공무원들의 세금 포탈 사건이 터져 김영삼 정부의 개혁 조치를 무색케 했다. 결국 1년 뒤에도 추락은 지속된다.(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또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정책혼선, 우루과이라운드 타결과 쌀수입 개방파동, 농안법 파동, 행정구역 파동 등으로 정부 정책조정 능력의 취약성도 드러났고, 심지어 감사원장 시절 사정작업으로 인기를 얻던 이회창 총리 졸속 경질파동도 김영삼의 개혁조치의 허상이 드러나기도 했다. 또 이기택이 민주당 총재가 된 이후 여야간의 갈등도 더해져 김영삼 정부의 국가경영 능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국민들의 대 정부 신뢰도는 급격히 약해졌다.

4.2. 신 공안정국 시대와 주사파 파동[편집]


민가협에서 작성한 1993~95년까지의 시국사건 일지

1994년은 '서울 불바다'로 대변되는 남북한의 전쟁위기 등으로 인해 인해 유독 국가보안법 적용사례가 가장 많았다. 이것이 절정을 이룬 때는 김일성 사후 조문파동과 박홍 신부의 '주사파' 발언이 있었던 때였다. 조문파동 이전에는 노래극단 '희망새' 구속사건을 비롯해 <사회주의자의 실천> 사건, 소설 <태백산맥> 이적시비 사건, 천리안 희망터 김일성 신년사 게시 사건, 천리안 현철동 <붉은 산 검은 피> 게시 사건 등이 대표적이었다.

김일성 사망 후 조문파동이 일어나던 1994년 7월 18일에 서강대 총장인 박홍 신부는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 주재로 전국 14개 대학 총장을 불러내 연 오찬에서 "주사파의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다"#라고 해 정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의 말의 요지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이 있으며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북한은 해외 6개 지역의 범민련본부에서 팩시밀리를 통해 남한의 주사파에게 지령을 보낸다. 이미 북한은 학생들에게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미군기지 반납운동 등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조문파동'에 이어 '주사파 파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어 19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친히 "국가수호를 위해 무차별 폭력과 낡아빠진 공산주의를 맹종하는 학생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사파 학생들에 대해 강력한 척결 의지를 밝히면서 '반공 히스테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21일에는 서강대 경영대 교수들이 먼저 박홍 총장 지지 성명을 표했고, 23일에 20개 대학총장들이 박홍 총장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박홍은 8월 1일에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교수가 되었다."라고 했고, 12일에는 종교, 언론, 정당, 문화계에까지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검찰은 박 총장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공안사건을 줄줄이 발표했다. 7월 21일에는 한총련과 범청학련 간의 팩스교류 사례를 공개했고, 25일에 법무부는 주사파를 사면/복권에서 제외시켰다.

이후 8월 3일에는 검찰이 장상환 등 경상대 교수 아홉 명이 공동으로 쓴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를 이적표현물로 몰아 수사에 착수했고 8월 4일에 경찰은 김일성주의청년동맹을 적발 검거했다고 발표했으며, 9일에는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의 이창복 의장 등 두 명을 구속했고 15일 제5차 범민족대회에 경찰 헬기와 병력을 투입해 공중에서 최루액을 뿌리며 해산작전을 펼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9월 7일에는 고교생에게 의식화 학습을 시켰다는 혐의로 고교생 조직 '샘'을 검거하고 <올바른 통일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게재한 고등학생 잡지 <새날열기>의 편집장 정동익을 이적표현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구속하기까지 했다.

민가협 조사에 따르면 9월 5일까지 구속된 양심수 수는 744명이며 신공안정국이 조성된 6~8월 구속자는 전체 구속자의 50%가 넘는 432명이었다. 이 기간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양심수는 1백58명으로 36.57%를 차지했다. 또한 9월 당시 양심수의 수는 모두 6백46명이며 이중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368명으로 56.96%로 나타났다.(참고)

4.3. 레게 스타일 열풍[편집]

이 해에는 국내 가요계와 패션계 등에서 레게 열풍이 들어왔던 해로 알려졌다. 그리고 레게의 영향으로 자메이칸과 카리브의 열풍이 더해져서 이 때부터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자메이카풍의 레게 문화가 유행을 했던 때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룰라 등의 레게 음악을 주제로 한 그룹이 데뷔하기도 하였고 가수 김건모 등도 레게풍의 음악으로 승부를 거는 등 이 해 국내가요계는 레게 열풍으로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아를 계기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메이칸 및 레게 스타일에 열광하였던 편이었으며 메렝게 같은 레게 악기들이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4.4. 오렌지족 X세대[편집]

또한 이 해에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오렌지족 X세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서울 압구정을 중심으로 압구정 오렌지족이 유행하였으며 또한 이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X세대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들은 기성세대 문화를 따분하다고 여기면서 자신들만의 개성을 세상에 알리며 그들만의 문화를 즐겼던 세대들이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 이들도 어느새 중년이 되었고 아이들을 둔 부모가 되었다. 그 이전의 세대의 세대차이는 문화적으로 공감대 형성이 어려울 만큼 큰 편이지만 그 이후의 세대의 세대차이는 오히려 적으며 기성세대와의 많은 공통점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4.5. 서울 지하철 2기 시대 개막[편집]

이 해는 서울 지하철의 운영 기관이 2개로 나뉜 해이기도 하였는데 그 동안 1~4호선을 맡았던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의 경쟁 상대로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가 출범하면서 5~8호선을 필두로 한 2기 지하철 시대[10] 및 지하철 공사간의 경쟁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23년 후에 두 공사는 하나가 된다.

 

- 1995년

냉전이 끝난 뒤에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게 된 WTO가 출범한 해다. 그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북한 대홍수, 씨프린스호 침몰 등 등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구급으로 여러 가지 재난이 일어난 해다. 극단적 민족주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해져 제1차 체첸 전쟁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이기도 하고 또한 보스니아 내전 당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자행된 가장 잔인한 전쟁범죄이자 학살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벌어졌었고 제1차 체첸 전쟁에서도 러시아군 전쟁범죄 학살이 동시에 자행된 피로 피를 씻는 잔혹한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쿠바 국민들이 집단으로 보트피플이 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에선 김영삼 대통령이 제창한 '세계화 원년'이란 구호가 무색하게 대형 재난사고, 해양생태계 오염 등 온갖 사건이 벌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면에선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해 세계은행 공인 고소득국가에 처음 돌입했고, 수출액도 1천억 달러를 돌파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분리수거나 쓰레기 버릴 때 흔히 보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가 이 때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됐다. 한진그룹, 대한페인트잉크, 해태그룹, 동아그룹, 태평양그룹, 대웅제약, 삼립식품, 고려제강 등 1945년에 창업한 해방둥이 기업들은 '창립 50주년'을 성대히 맞이했고, 경찰청도 '한국경찰 창설 50주년'을 맞이하였다.

정치권에선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YS와 갈등으로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고,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김대중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정계에 복귀해 '신 3김시대'를 열었다. 여름까지만 해도 5공 청산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려던 정부도 10월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내역 폭로로 '역사 바로세우기'를 본격 발동해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대검찰청에 소환/구속시켜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을 참고.) 반면 북한에선 김일성 사후 '유훈통치'라는 비상식적 체제 하에 대홍수와 자연재해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이 때부터 케이블 채널 시대가 개막됐으며 3월 1일자로 케이블 채널들이 동시 개국하였다. 이를 계기로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간의 공생과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지상파에서 활동했던 배우 및 방송인들도 케이블 채널로 영역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케이블이건 다른 형태건 다(多)채널을 진작 좀 해주지. 노태우 집권 초기부터, 하다못해 김영삼 집권 직후부터. 이와 더불어 이 해 5월 14일 대구방송, 광주방송, 부산방송(현 KNN), 대전방송 등 SBS 제휴 4개 민방이 개국해 '지역 민영 네트워크' 시대를 열어 비수도권 지역에서도 SBS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 됐다.

이 해는 남북한 통틀어 광복 50년을 맞은 해로 한국에선 70년 만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철거해 경복궁 2차 복원을 시작하게 되었며, 북한측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총체적 난국 속에서 소위 '해방 50돐'을 맞이하기도 했다. 반면 2차 대전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서는 '승전 50년', 인도네시아에선 '독립 50년', 일본과 독일 등 구 추축국에선 '패전 50년'이라 칭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인기있던 해이다.[2] 전년도 챔피언인 LG 트윈스야 말할 것도 없고 전통적 인기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와 전년도의 흑역사를 딛고 일어난 OB 베어스까지 성적이 잘 나왔다. 이 해의 OB와 LG의 경기는 거의 만원이었을 정도. 특히 OB 베어스는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원년 이후 13년만에 우승했다. 농구대잔치 역시 인기를 구가하여 1994/95 시즌에 허동택 트리오를 앞세운 기아농구단이 2년만에 왕좌를 차지했고, 전희철-김병철-현주엽-양경민-신기성 등 베스트 5를 앞세운 고려대 농구부는 라이벌 연세대와 타 대학들을 제치고 대학농구 1,2차, MBC배, SBS배 고교대학농구최강전까지 석권해 대학농구 그랜드슬램을 달성해냈다. 미국 NBA에선 2년 동안 야구선수 노릇한 마이클 조던이 1994/95 시즌 막판에 복귀해 큰 주목을 받았으며, NBA의 세계화 정책에 따라 토론토 랩터스와 밴쿠버 그리즐리스라는 새 팀이 생겼다. 이는 토론토 허스키스 해체 뒤 48년만에 생긴 캐나다 신규팀들이다.

또 우리나라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그 때인데, 유럽카툰작가협회가 한국지부(FECO KOREA)를 세웠고,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가 처음 개최되어 당대 오덕들을 환호케 했다. 성인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세주문화)>와 <투엔티 세븐(대원)>, <빅 점프(서울문화사)> 3개 잡지가 창간된 것도 이 때였다. 차덕들 역시 서울모터쇼가 처음 개최되면서 '우리나라도 제대로 된 모터쇼를 처음 열었다'며 환호하기도 했다.

다이 하드 3 아폴로 13호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희한하게도 죽을 쑨 해였다. 워낙 전해 이듬해의 영화들이 무시무시한 대박을 친 이유도 있지만. 오죽하면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가 굉장히 성공했다고 했겠는가…[3] 저주받은 1995년 영화 한국 극장애니 역시 <붉은매>나 <헝그리 베스트 5>가 야심차게 나왔지만 명작 평가까진 못 받았다.

IT계에선 마이크로소프트가 Windows 95를 발매해 대혁명을 일으켰고[4], '알타비스타' 등 우리가 알 만한 포털사이트 대다수도 이때 나왔으며, 한국에선 중앙일보가 신문사 중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어 '인터넷 언론시대 개막'을 알려 한국경제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등이 뒤따르게 했다.

한편 창설 50주년을 맞은 UN은 이 해를 '세계 관용의 해'로, 문화체육부에서는 미술의 해로 각각 지정하였다.이 시점부터 대기업들이 능력별 진급제를 도입하고 연공서열을 폐지하면서 명예퇴직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에서 선정한 1995년 올해의 한자는 '震(우레 진)'이다. 또한 올해의 한자 캠페인이 처음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음력 윤8월이 가장 최근에 든 해였다.

이 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마지막으로 70만명이 출생한 해다. 95년생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출산자수가 계속 감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위 에코붐 세대의 끝자락이라고 할수있다. Z세대의 시작이기도 하고...

전술했듯 한국 애니계는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 <붉은매> 등 대작이 될 만한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친 채 죽을 쑨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최고의 해이기도 하였다. 신기동전기 건담 W, 애천사전설 웨딩피치, 환상게임, 마법기사 레이어스 등 쟁쟁한 애니들이 연달아 나왔고 하반기에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나오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만화 쪽은 <드래곤볼>의 완결로 주간 소년점프의 암흑기가 점차 드리워졌다.

1995년 출생자들은 주민등록번호의 뒷자리가 3 또는 4로 시작하는 2000년 이후 출생자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던 첫 세대이다.[5]

날개없는 추락, 1995년 문민정부[편집]

1995년에 들어서도 문민정부의 위기 상황은 나이지지 않았다. 육사 출신 현역 장교의 은행강도사건을 비롯해 한진해운 컨테이너선 화재사고, 인천지법 집달관 비리사건, 김성복 교수의 부친 패륜살인사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대형사건이 줄줄이 이어졌고, 김숙희 교육부장관 사퇴파동과 이형구 노동부 장관 구속 사건으로 정부의 공신력도 흔들렸다. 또 김종필 민자당 대표 축출과 자유민주연합 창당, 지방선거 공천 배제 파동으로 여야 관계도 더욱 악화되었고, 대북 쌀 지원 파동과 그에 따른 강경책 회귀로 남북관계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5월 한국통신 파업 사태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국가 전복기도' 운운하는 발언과 검찰의 5.18 '공소권 없음' 결정은 문민정부의 개혁 의지를 의심케 만들어 민주 개혁세력에게도 심각한 반발을 초래했고,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 양봉수와 대우조선 노조원 박삼훈, 지체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분신자살 사건, 이덕인 의문사 사건, 박창희 외대 교수 간첩조작 사건과 같이 공안탄압, 노동운동탄압 문제 등이 불거졌고, 같은 해 초 네팔인 산업연수생 명동성당 농성을 계기로 외국인노동자 인권침해 문제도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문민정부의 개혁은 그 방향타를 상실했고, 개혁의 표류가 가시화되었다.

집권 초기 정점을 찍었던 문민정부의 인기는 온갖 대형 사건과 국정의 난맥상으로 급격히 추락했고, 1995년에 이르러선 지지도가 20%대로 줄어들었다. 거기에 1994년부터 이미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거세지면서 김영삼 정부는 태생적 한계를 노출시켜 버렸다. 국민과 함께, 야당의 파트너로 삼아 개혁을 하기보다 보수세력과 손을 잡고자 했다. 이러한 성향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드러났다.

4.2. 일본도 다사다난한 해였던 1995년[편집]

일본 역시 1995년에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건사고로 곤욕을 치렀던 해였다.

당장 1월 부터 규모 7.3의 효고현 남부 지진이 일어나 고베시 등지에 큰 피해가 일어났으며, 사망자 6,437명, 부상자 43,792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약 1400억 달러의 금전적 손해가 발생해 일본 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그후, 얼마안가 3월에 또 사이비 종교로 악명높은 옴진리교에 의해 일어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나 14명이 숨지고 6,300여명이 부상당하게 된 것은 물론, 테러 주체가 사이비 종교였던 탓에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일었다.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이러한 대형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일본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결국 1996년 초에 사임하게 되고,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자유민주당이 갖게 되고, 당시 자민당 대표였던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로 선출된다.

엔고현상도 큰 관심거리였다. 95년 1달러에 100엔으로 시작한 엔달러환율이 95년 4월 19일에는 장중 79엔,종가 80엔이라는 역사적 저점을 찍게 된다. 그러나 강한 달러를 주장하는 미국의 루빈 재무장관과 일본정부의 공동개입에 따라 다시 상승하여 95년 12월에는 103엔으로 한해를 마감한다.

4.3.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시대의 개막[편집]

이 해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정치사회적으로 5.16 군사정변 이후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경질하였던 광역자치단체장(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을 비롯해 기초자치단체장(시장, 군수, 구청장)들이 민선을 통해서 각자 지역의 수장이 되었던 의미있는 해이기도 하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지자체의 장들은 주민들의 투표의사와 결과에 따라 지역을 이끌어가는 수장이 되었다.

지방자치제가 완전히 시행된 것은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최초라고는 할 수 없는 게, 5.16 이전 1952~1961년 동안 잠시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엔 시행기간이 짧았고, 쿠데타에 의해 사라졌다. 그것이 부활한 것은 1991년 지방선거 때 일이었으나, 지자체의 장은 뽑지 않았다.

이때의 단체장 임기는 지금과는 달리 3년이었는데, 이 선거에만 국한된 임기였고 이후로는 4년이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단 단체장 선거를 1995년에 실시하되, 다음 선거를 1998년에 치러서 총선과 2년 간격이 되도록 맞추기 위해서 여야가 합의한 거였다.

4.4. 도농통합시의 출범[편집]

주요 도심지만 시를 승격해서 일어난 행정구역의 도넛 현상을 극복하고, 행정구역의 갯수를 줄이기 위해 분리 승격된 시 일부가 합쳐졌다.

4.5. 광복 50년과 분단 50년, 그리고 한일, 남북관계[편집]

이 해는 역사적으로 광복 50년을 맞이하였던 해였다. 이에 맞춰 김영삼 정부는 일제 잔재의 청산책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경복궁을 복원하기로 하였다.

또한 한일관계에서 있어서는 한일수교 30년을 맞이한 후에도 여전히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막장적인 태도와 위안부 문제 등이 남아있어서 여전히 갈등의 불씨로 남아있었다. 이 같은 일본의 행태는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분단 50년이라 남북관계도 50년이 되도록 긴장감과 갈등의 불씨가 남아있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은 이후에도 아들 김정일의 승계로 남북간에는 여전히 이질감과 분쟁이 있어보였다.

4.6. 케이블 다채널 시대 개막[편집]

이 해 3월 1일에는 20개 채널로 시작해 역사적으로 케이블 다채널 방송들이 잇따라 개국하였던 첫 시기였다. 그 동안 지상파 방송사만이 영위를 누렸던 때와는 다르게 전문성 다채널들을 통해서 전문적인 내용과 분야를 만날 수 있었고 원하는 채널을 마음놓고 볼 수도 있어서 방송계에 역사적인 변혁을 일으켰다.

동시에 케이블 채널의 영향으로 비디오가 점차 위축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 동안 지상파 방송이 평일 중에는 정파상태여서 비디오로 대체해서 볼 수 있었던 때와는 다르게 케이블 채널은 평일 낮에도 방송을 한다는 점 때문에 그 동안 평일 낮에 TV를 볼 수 없었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해 12월 1일에 투니버스가 개국하면서 그동안 지상파 채널에서 지정된 시간에만 볼 수 있었던 애니메이션을 투니버스 채널에서 하루 종일 볼 수 있는 변화가 생겼다.

여담으로, 지상파에서 활동하였던 일부 배우와 가수들도 케이블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이 때부터 케이블 러시가 이어졌다.
 
 
 
- 1996년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문민정부에서 그나마 좋았던 해[1] 그리고 1990년대에도 이어지던 학생운동권이 연세대 사태로 KO펀치를 맞아 쇠퇴하기 시작했다. 종신 정년제, 연공 서열제 등 일본식 고용제도를 채택한 기업들이 서구권 모델인 능력별 진급제를 도입하고 명예 퇴직을 권유하는 일이 많아져 '명퇴 증후군', '실직 증후군'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나는 등 다가올 경제 위기가 예고되기도 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선진국으로 올라선 해이며, 초대형 사고 없이 무사히 잘 넘어갔으나, 정치권에선 15대 총선 이후 문민정부의 보수회귀 기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등으로 지지도가 하락하여 레임덕의 가속화와 경제 면에선 무역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치로 200억 달러까지 돌파하면서 외채가 1천억 불을 넘는 등 경제에 잇달아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에 크게 터지고 말았다.

Windows 95가 설치된 PC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이다.[2] 또한 김영삼 대통령은 그해 10월 14일부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5대 목표'를 발표하기도 했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5대 목표

1.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가 협력하는 열린사회
"정보를 가진 자"와 "정보를 못 가진 자"의 격차를 해소, 모든 국민들이 정보와 지식을 공유해 차별없이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보접근에 있어서의 기회균등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2. 인간중심의 가치를 창조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는 사회
인간이 자연을 보다 지혜롭게 이용하고 자연파괴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정보기술을 활용한다.

3. 전통문화가 발전적으로 전파되고 계승되는 문화사회
정보사회에서는 문화의 교류가 그 어느때보다도 빠르게 진행될 것이며 세계 각국의 새로운 정보시스템들은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므로 우리도 정보화를 통해 우리의 우수한 문화자원을 정보자원으로 적극 개발,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4. 투명하고 공정한 정보민주주의 사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적기에 제공하는 것이 정보민주주의 구현의 실체다. 정보민주주의에서는 열려 있는 전자공간을 통해 국민들의 알 권리, 의사표현의 자유, 신념의 자유 등이 보다 확실히 보장될 수 있다.

5. 인류공동번영에 기여하는 아시아의 정보중심국가
APII를 제창, 실현시킨 데 이어 앞으로도 아시아지역의 이해증진과 공동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적극적인 국제협력을 추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진보진영 입장에서 1996년은 '통신사상 암흑의 해'라 불릴 정도로 공권력에 의한 사이버 공간 단속이 가장 심했다. 이는 아래에 후술.

IT업계에선 혁신이라 불릴 만한 해인데, 최초의 한국산 온라인 그래픽 게임 바람의 나라가 1996년 4월 5일부터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하여 우리 온라인게임 시대를 개막했다.[3] 그리고 '무궁화위성 2호' 발사로 KBS가 위성방송 채널 2개를 국내 최초로 개국했고, 국내 이동전화업계에선 2G 기반 서비스 'CDMA' 시대가 개막되었다.

종전 국민학교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초등학교로 바뀐 첫 해이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교육 학사일정이 시작되는 3월 1일부터이다. 간혹 83년생들이 초등학교 졸업했다고 말하도 하는데, 1996년 3월을 기준으로 바뀐 것이기에 1996년 2월에 졸업한 1983년생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한게 맞다.

2002년 월드컵이 사상 최초로 아시아 국가인 한국 일본에서 공동개최를 하기로 확정되었다(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 당시 양국에서는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경쟁으로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다. 같은 시기 하시모토 류타로 신임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3년만에 재집권함으로서 일본의 우경화가 점차 급증되어 1995년에 이어 독도 영유권 및 일본 정치인의 망언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어느 때보다 격랑을 맞았던 때이기도 했고 남북관계 역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더 악화되어 대북경협까지 동결되었다.

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개봉으로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에서만 역대 한 해 흥행 수입과 관객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기도 하여 94년의 기록을 경신했으며, 한국에선 영화사전심의제 철폐와 <은행나무 침대> 흥행, 영화진흥법 제정, 대기업의 영화산업 전폭지원 확산 등 으로 우리 영화사상 귀중한 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95년 영화 지못미. 학계에선 미국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저서 <문명의 충돌>을 발표해 냉전시대 이념전쟁 대신 앞으로 '종교/문명권 간 충돌'을 예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포츠계에선 프로야구팀 현대 유니콘스 데뷔 첫 해에 30-30 클럽을 달성한 괴물 신인 박재홍과 쟁쟁한 투수진을 앞세워 포스트시즌에서 한화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를 잇따라 물리치며[4]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등 삼청태 때의 한을 풀었고, 농구대잔치에선 기아의 V7, 고려대 돌풍 와중에 문경은, 이상민 등 최강전력이 복무 중이던 상무 농구단이 결승전까지 가는 파란을 일으켰다.

미국 MLB에선 뉴욕 양키스가 WS에서 18년 만에 다시 우승하여 명가의 부활을 알렸다. 또 NBA 인기팀 시카고 불스가 조던-피펜-로드먼 삼총사로 재편한 뒤 정규시즌에서 72승을 달성해 1972년 LA 레이커스의 69승을 뛰어넘었고, 파이널에서 게리 페이튼-숀 켐프 콤비가 이끄는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V2 시도를 막아 3년만에 통산 4회 우승을 달성했다. 또 NFL의 명문팀 댈러스 카우보이스가 이 해 5번째로 슈퍼볼에 우승했는데 이 해를 마지막으로 2021년 현재까지 슈퍼볼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UN은 이 해를 '빈곤퇴치의 해'로 지정했고, 문화체육부에서는 이 해를 문학의 해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박노해, 황석영, 김하기, 진관 스님 등 양심있는 작가들이 이미 구속되었거나 새로 구속되었기 때문에 재야 계열에선 '문학 탄압의 해'로 꼽히기도 했다. 언론계에선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기준으로 '한국신문 100주년'을 성대히 맞이했고, 국내 최고령 대기업 두산그룹이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극단적 민족주의로 일어난 전쟁들이 강대국들의 중재로 종전을 한 곳이 많다. 1995년 12월에 종전 협정을 맺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1996년 3월부터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군이 철수를 시작했으며, 1996년 9월에 종전 협정을 맺은 체첸에서는 러시아군이 1997년 1월까지 철수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6년 올해의 한자는 '食(먹을 식)'이었다.

어째 언급이 잘 안 됐는데 이 해는 병자년이었다. 1976년 병진년보다도 더 묻힌 감이 있다.

경기도 파주군, 용인군 이천군, 충청남도 논산군, 경상남도 양산군이 시로 승격된 해다. 또한 용인에 위치한 자연농원도 이때 에버랜드로 개명되었으며 캐리비안 베이도 개장했다.

공무원 시험에서 국민윤리 과목이 폐지된 해이며,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서 수학이 제외되고 행정학이 추가된 해이기도 하다.
 
 

실종된 개혁의지, 1996년 문민정부[편집]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패배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보수회귀로 차기 재집권의 기회를 마련코자 했다. 그는 지방선거가 끝난 3주일 뒤 7월 20일에 민자당 당무위원과 상근 당직 초청 조찬에서 "1996년에 있을 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선 후보자 공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당을 직접 장악해 차기 대권 구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김영삼은 이를 실행해 당명도 12월 6일부터 '신한국당'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1996년 4월 11일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과반수에 미달했음에도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이처럼 '안정 위에 중단', '중단 위에 개혁'을 외치던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국민들의 불신 속에서 이미 물 건너갔고, 대신 김영삼 정부의 행태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그해 3월 연세대생 노수석 사망사건, 6월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강제연행 사건, 11월 27일 평택 에바다농아원 농성 강제진압, 12월 안기부법 및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또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은 기습적으로 임시국회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날 본회의에는 신한국당 157명 중 외유중인 김윤환 고문과 야당의 감시를 받고 있던 김수한 국회의장을 뺀 155명 전원이 참석했다. 이에 야당은 반발해 국회 농성에 들어갔으며, 민주노총도 다음날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김영삼 정부 몰락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심판 : 그러나 12월 16일, 전두환 노태우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렇지만 항소심 선고에서 눈에 띄는 건 6.29 선언 이전의 정부를 '내란에 의한 정부'라 규정한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 1부는 이날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전두환에게 군 형법상 반란죄와 내란죄, 뇌물수수죄 등을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노태우에 대해서도 같은 죄목으로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또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임 중 기업체 등으로부터 뇌물로 거둬들인 2,205억 원과 2,628억 원을 각각 추징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은 반란 중요임무 종사죄 등을 적용해 각각 징역 8년을, 그리고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은 징역 7년을 각각 선고했다. 또 허삼수, 유학성 징역 6년, 최세창 징역 5년, 그리고 차규헌, 장세동, 신윤희, 박종규는 징역 3년 6월이 선고되는 등 대부분 1심보다 낮은 형량이 선고됐다. 한편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박준병은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1심에서 유죄를 받은 15명 가운데 전두환에 대해서는 사형에서 무기로, 노태우에 대해서도 징역 22년 6월에서 17년으로 감형하는 등 형을 낮췄지만, 주영복에 대해서만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5.17 내란을 통해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등 힘으로 정권을 탈취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6.29 선언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한 점 등을 참작해 형량을 낮춘다'고 밝혔다.[5] 항소심 재판부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1심 판결은 물론, 검찰 공소사실의 대부분을 인정했으나 두 사람에 대한 양형에는 관대했다. 권성 재판장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하극상의 패역으로 군의 기강을 파괴했다고 전두환을 질타했다. 5.17과 관련해서는 내란을 일으켜 힘으로 권력을 탈취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군사통치의 종식을 기대하는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판결했다. 노태우에 대해서는 분수에 맞지 않게 시종 전두환의 뒤를 따라 영화를 누렸다고 비판했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이처럼 두 사람의 죄를 따지는데 엄격했다. 쟁점이었던 국헌문란의 폭동 종료시점을 1987년 6.29 선언으로 판단해 5공의 정통성을 사법적 판단으로 부인하는 과감함도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양형에는 관대함을 보였다. 권력의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정치문화로부터 탈피하는 일은 쿠데타를 응징하는 것에 못지않게 필요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전두환의 형을 줄여주었다. 마찬가지로 노태우에 대한 형도 줄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선고는 실무적인 사법적 판단보다는 고도의 정치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어 논란을 빚었다.[6]

여의도 지하철 시대의 개막[편집]

그 동안 1~4호선 노선에서 제외되었던 서울 여의도 지역이 수도권 전철 5호선의 부분 개통으로 본격적인 여의도 지하철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울 강서권 지역도 지하철 시대가 개막됨으로서 기존 지하철 노선에서 제외되었던 서울 여의도와 강서권 지역이 역세권 지역에 포함되어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시대가 개막되어 여의도 직장인들의 출근길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그 후 2009년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이 들어서면서 강남 방향으로의 이동도 편리해진다.

3.4. 정보인권 침해의 해, 1996년[편집]

당시 진보/재야계열을 비롯한 일반 네티즌 입장에서 1996년은 '통신사상 암흑의 해'라 불릴 정도로 공권력에 의한 사이버 공간 단속이 가장 심했다.

그해 4월에는 15대 총선을 즈음해 검찰이 PC통신 게시판에서 특정 후보들을 비방한 20여명을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한 것을 비롯해 8월에는 나우누리에 있던 한총련 CUG를 경찰이 나우콤 본사를 압수수색해 강제로 폐쇄했고, 9월에는 경찰이 강릉 무장공비 사건 조작설을 PC통신 게시판에 유포한 유저들에 대해 수사를 착수하여[10] 10월에는 <그들이 무장공비인가>를 올린 윤석전씨를 구속한 바 있었다. 이 사태로 인해 PC통신 상에서 시사와 관련된 게시글 수가 감소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이듬해에 열린 15대 총선 당시 선거법의 엄중 적용 당시에도 발생했다.

이러한 공권력의 사이버공간 검열 움직임에 네티즌들은 PC통신 게시판에 같은 시기에 미국의 네티즌들이 통신품위법에 항의하기 위한 '블루리본운동'을 본따 '하얀리본(▷◁)'을 달아 끈질기게 항의했다. 어쩌면 이는 요즘 말하는 '온라인 시위'의 시초격이기도 하다.

3.5. 서태지와 아이들 공식 해체, 그리고 서기회의 정신 계승[편집]

“저희는 오늘, 1996년 1월 31일을 기하여 지난 4년간의 가요계 생활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지난 92년 4월, 1집 <난알아요>를 발표한 이후 4집 까지의 가슴 벅찼던 감사의 시간들을 이제는 접고, 모든 것을 훗날의 평가에 맡긴채 <서태지와 아이들>은 떠나려 합니다.”(중략)

― 은퇴 선언 내용 中 #
이 해 서태지 팬들에게는 가슴 아픈 한 해이기도 하였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 해체를 선언하였던 해여서 서태지 팬들과 젊은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90년대 가요계를 풍미하며 기성문화를 거부하고 개성있고 파격적인 공세로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는 그 당시만 했어도 충격이자 이변적인 일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관련 기자회견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90년대 신세대 문화를 이끌어왔고 가요계를 이끌어왔던 그들이었기에 해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고 해체에 슬픔을 느끼는 팬들도 많았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한 이후 90년대 후반에 들어서 H.O.T.라는 신성 아이돌 그룹이 이들의 바톤을 이어받아 가요계를 주름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세대 아이돌들의 전성기가 개막되었다.

세간에서는 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을 잠정적인 아이돌 그룹이라고도 보고 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기 이전인 80년대까지는 아이돌 그룹도 없고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파격적인 그룹도 없었던데다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90년대 후반에서 1세대 아이돌 그룹이 탄생한 것을 봐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아이돌 그룹의 선조가 아닌가하는 추측도 내놨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 아이돌 그룹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하는 그런 짐작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태지보이스는 사라져도 그들이 남긴 자유와 도전정신은 죽지 않았다. 이들이 은퇴한 지 두어 달 뒤인 1996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이하 서기회)'가 발족되었다. 전국적으로 13,000여 명을 둔 이 단체의 회장인 강민경은 서기회가 팬클럽이 아닌 서태지의 뜻을 이어받은 문화단체라 하여 "맹목적인 열광이 아닙니다. 서기회 회원들은 모두 '태지보이스 팬답게 행동하자'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활동은 1996~1997년 겨울을 강타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정국 때 PC통신상의 활동에서 드러났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정신'이라는 믿음으로 블랙리본 내걸기를 제안했고, 사회문제란인 '시대유감'과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는가'란 토론방에서 10~20대의 젊은 회원들이 총파업 지지글을 올리는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 나우누리의 서태지와 아이들 팬클럽도 "태지보이스가 그렇게 부르짖던 자유와 도전은 모두 민주주의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에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국민을 기만한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을 개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여 '근조 민주주의'라고 적힌 검은 리본을 내걸었다.

여담으로, 같은 해 7월 30일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도 당사 총재실에서 서기회가 준비한 영상 콘서트 축하 메시지를 녹화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좋은 의미에서 우리나라 신세대의 대표적 존재로 보며 소중히 생각한다"며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했지만 예술인이란 대중의 사람으로 대중이 원하면 하루 속히 복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 <발해를 꿈꾸며>에서 "언젠가 우리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란 가사를 외우며 "이런 가사는 정말 감동적"이라 평했다.
 
 
 
- 1997년
 
 
1950년 이후로 최악의 해라고 불리는 해이며[2], 1990년대 중에서 가장 힘든 한 해 였다. 당년 초부터 전년도에 이은 레임덕과 노동법-안기부법 반대 총파업으로 초반 정국이 시끄럽던 차에 대기업 한보그룹의 파산을 시작으로 김현철 스캔들, 황장엽 탈북 등으로 정국이 뜨거웠고, 그 해 연말에는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져버렸다. 1996년까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아시아의 네 마리 용"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이라며 "기초가 튼튼하다던" 한국이었지만, 태국,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북상하는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영국 조차지 홍콩 중국에게 반환되었다.

1996년까지는 비록 '사고공화국'이니 하는 등의 비판도 나왔지만 1인당 GDP가 역사상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돌파하는 등, 지속적인 사회 발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과 같은 작품이 계속 나오는 것도 이 시기의 추억에 대한 나름의 향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97년은 남북한간 최악의 대치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경제는 1997년 외환 위기(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이 6480억원)를 맞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존망마저 위태로운 시기였다. 심지어 학생 운동권도 전년도에 이어 한총련 5기 출범식 사태를 비롯해 이석 치사사건, 이종권 치사사건 등 프락치 오인 살해사건과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 등 공안사건 발생 등에 따른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쇠퇴했고, 한총련을 탈퇴하는 총학 수도 갈수록 늘어갔다.

1997년 12월, IMF 사태가 터지던 시기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3]

문민정부 초기인 1993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악이다. 그동안 달성했던 치적들이 임기 말에 묻혀 싸그리 날아갔을 정도로 파장이 컸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좋은 일도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정치권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이 북풍공작 등 사상공세에도 불구하고 15대 대선에서 이회창을 누르고 당선해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했다. IT업계에선 1996년도의 CDMA에 이어 이 해에 PCS 이동전화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역사 및 한글학계에서도 '세종대왕 탄생 600주년'을 성대히 기념했다. 또 울산시가 경상남도에서 분리돼 비로소 광역시가 됐다.

방송계에선 '한국방송 70주년'을 성대히 기념한 가운데 상반기부터 가요프로에 변화가 생겼는데, KBS2 가요톱10이 1월부터 립싱크 표시를 붙였고,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은 국내 최초로 전 분량을 라이브로 바꿔 립싱크를 추방시켰다. 아울러 경인, 충북, 전북, 울산 4개 지역에 민방이 생겼으며, 특히 경인지역을 뺀 3개 지역은 SBS 프로그램들을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동시에 지상파 방송 3사가 VOD 서비스를 실시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금융계에선 조흥증권이 국내 최초로 인터넷 홈트레이딩 서비스를 실시해 객장 대신 안방에서 주식시세를 손쉽게 볼 수 있게 해 줬고, 국내 고령기업 동화약품 조흥은행이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법조계에선 1997년은 사형제가 실시된 마지막 해이다. 이후 1998년부터는 사실상 사형 선고가 내려져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7년 올해의 한자는 '倒(넘어질 도)'였고, 문화체육부에서는 이 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했다.

한국에서는 1997년 이후 광우병 발생지역 영국에서 3개월 이상 체류한 사람은 헌혈을 영구적으로 금지했다. 이것은 1980년부터 1996년까지의 1개월에 비해서는 상당히 완화되었으나 이 조항 때문에 영국으로 진출한 축구선수 박지성 손흥민은 평생 헌혈을 못 하게 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사태와 국가 부도[편집]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도 못 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5]


11월 8일, 당시 임기말의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김영삼 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11월 19일,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이 새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다.

환율 변동 폭을 현행 2.25% 범위 내에서 10% 범위내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이튿날 11월 21일,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

구제금융 요청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된 것으로 임창열 부총리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통령 후보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에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밤 10시에 IMF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임창열 부총리는 그날 우리나라를 방문 중인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모시 게이디너 美 재무부 차관보와의 잇단 접촉에서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IMF부총리의 긴박했던 협상

IMF의 지원받은 나라들 경제주권 포기할 정도 아시다시피 IMF는 그냥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며 IMF에 돈을 빌린 나라들은 IMF의 명령에 따라 경제운영을 해야 한다.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는데 캉드쉬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먼저, 550억 달러의 자금 조달 내역을 보게 되면 국제통화기금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등 국제기구에서 350억 달러를 지원하는데 합의했다. 12월 3일을 시점으로 사실상 경제주권을 국제통화기금에 바친 셈(즉, 대한민국의 IMF 관리 체제 진입)으로 그 이후 2001년 8월까지 4년간 한국경제는 국제통화기금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IMF, 긴급 자금지원




한국도 IMF에 돈을 빌리고 그들의 뜻에 따르는 조건으로 경제주권을 IMF의 손에 맡기는 처지가 되었다.IMF 협약 반드시 지켜야

당시 IMF 총재 미셸 캉드쉬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대한민국 정부를 위협했다.

4.2. 청소년보호법 제정과 한국 성인만화의 몰락[편집]


검찰에 소환되는 이현세 화백.

임기말 레임덕 상황을 겪던 김영삼 정부는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관한 문제를 거론해 표심을 잡기 위해 학교폭력 문제를 단속하자는 명분으로 1996년에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에 대한 법률안’을 들고 일어났다. 발의 당시 청소년 보호를 빙자하여 위장된 검열을 행하는 데다가 그 검열 판단의 결정을 행정기관이 판단한다는 점에서 언론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반발이 거셌고, 무엇보다 이미 존재하는 법인 형법 제243조(음화반포)와 미성년자보호법과 중복되는 입법인데다 법에 명시된 심의 기준이 애매모호해 죄형법정주의 5대 원칙 중 하나인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국 3월 7일부로 통과되고 말았다.

1997년 3월 7일부로 법명이 '청소년보호법'으로 결정되어 법이 공포됨과 동시에 동법 제45조에 의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를 사단법인에서 법정기구로 바꾸고 난 뒤 1961년 한국아동만화자율회 시절부터 실시한 만화 사전심의제도를 36년만에 사후심의로 바꾸는 한편 동법 제2장에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규정을 만들어 앞으로 유해매체 표시를 달지 않은 성인만화의 경우 이를 판매한 업자를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4월 15일에는 '음란/폭력성조장매체공동대책협의회(이하 음대협)'가 국내 3대 스포츠신문 발행인과 편집국 책임자들을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을 적용하여 즉각 고발하는 바람에 5월 26일에는 배금택과 이두호 등 만화가와 소설가, 스포츠신문 편집자가 먼저 검찰에 소환되었다.

이보다 더 주목할 것은 7월 1일은 '만화사냥의 여름'이 시작되어 한국 만화계의 암흑기가 형성된 날이다. 마침 같은 시기에 '일진회 사건'이 터지자 언론들은 <캠퍼스 블루스>등의 만화를 거론했고, 동월 2일부터 신한국당 대표 이회창이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공권력의 만화 단속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검찰과 경찰은 전국의 만화소매상, 만화방, 도서대여점 등지를 상대로 일제 단속을 벌여 만화책을 마구잡이로 압수하여 9일에는 미등록 출판사 대표 및 만화방 업주 142명을 입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었다.

그러나 동월 23일에 천국의 신화에서 묘사된 음란성/폭력성을 문제삼아 원작자인 이현세 화백을 요청 4일만에 소환시켜 법정에 세웠고, 8월 1일에는 음대협의 고발을 받아들인 검찰은 스포츠신문 만화가들과 책임자들을 대거 소환하여 강철수, 방학기 등 스포츠신문 만화가 8명도 같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이중 조운학 등 세 명은 약식 기소, 이두호, 황재, 배금택, 오일룡 등은 기소 유예되었다. 그리고 7월 31일에는 성인 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세주문화사)>, <투엔티 세븐(대원)>, <빅 점프(서울문화사)> 등이 발행을 중단했다. 이에 만화계가 일제히 반발해 7월 15일에 PC통신 '만화수호연합'이 첫 성명서를 낸 것을 시작으로 29일에는 한국만화가협회,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 등 9개 만화 관련 단체들이 모인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의 '만화 탄압'에 대한 범만화인 성명서>를 냈다.

4.3. 한국에 몰아닥친 '세일러문 붐'[편집]

이 해는 4월경에 KBS 2TV를 통해서 1992년 일본에서 방영하였던 애니메이션 세일러문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첫 방영하였던 해이기도 하다. 일본에 비해서 5년 늦게 국내방영을 하였는데 그 당시가 김영삼 문민정부 말엽이었고 해방 이후 50여년을 지켜온 철저한 대(對) 일본문화 봉인정책과 청소년보호법 제정의 여파로 일부 내용이 국내 심의상으로 대폭 수정, 개편되었던 영향이 있었다. 특히 히노 레이(국내명: 비키)가 나오는 일본식 신사가 나오는 장면이 통째로 삭제되었으며 미즈노 아미(국내명: 유리)가 남친인 우라와(국내명: 피터)와의 만남상에서 우라와가 세일러 머큐리를 공격하는 꿈의 내용 중 머큐리가 옷이 찢어져 나체가 되는 장면 등이 통째로 삭제되었고 또한 히노 레이가 첫 등장하는 장면마저도 편집수정되어서 그 당시 이러한 사정을 몰랐다가 뒤늦게서야 삭제편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시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또한 이 때는 1998년 일본문화 대개방이 이뤄지기도 1년 전의 일이었고 김영삼 정부까지 역대 정권들의 정치사회적 노선상 일본문화에 대한 봉인책도 유지되었던 편이라 일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1,2년만 늦게 방영했다면 좋았다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6] 후에 대원방송에서 무삭제판으로 재방영을 하였다.

그리고 1년 먼저 투니버스 MBC에서 방영하였던 웨딩피치에 비해서 늦게 방영하였던 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세일러문이 웨딩피치보다 3년 먼저 방영하여 선점하였던 편이지만 국내에서는 심의 등의 사정으로 웨딩피치보다 1년 늦게 방영을 하였던 영향으로 웨딩피치가 선점하였다는 점이 있다. 물론 그 당시는 지금에 비해서 다운로드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TV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국내에서 세일러문이 웨딩피치보다 먼저 나왔다고 알려주면 오히려 놀라거나 정반대였다는 사실에 믿기지 못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 때는 컴퓨터를 보유하는 가정도 드물고 인터넷도 할 수 없던 시절[7]이었고 당시엔 일본만화를 제대로 접해보고 일본의 신작만화에 대한 정보를 알려면 직접 현지에 일정 기간 체류하거나, 지인이 재일동포 혹은 현지인이거나, 송락현같은 일본애니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2010년대로 접어든 이후에는 국내에서 세일러문에 대한 인지도가 아주 낮아졌거나 소멸된 편이었지만[8] 이 때까지만 했어도 국내에서는 세일러문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던 편이었으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완구와 팬시 등이 많이 출시되었던 편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당시 10대 시절을 보냈던 20대 이상 성인들 및 세일러문 매니아들을 위한 키덜트 용품이 인터넷 쇼핑상에서 나오는 편이라 세일러문의 열기가 이들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편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이 시기에 방영한 애니메이션들은 전체적으로 주춤한 시기였는데 2년 전인 1995년에는 다양한 대작들이 나오면서 최고의 해를 누렸으나 이 해에 방영한 애니들은 대체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70년대 초반부터 명맥을 이어오면서 일본의 경제 호황을 함께 해온 세계명작극장이 점차 인기를 잃으며 명맥이 끊어지기도 하였다. 극장판이나 OVA로 나왔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기동전기 건담 W은 상당한 호평을 받은 반면 이 당시 방영한 드래곤볼 GT는 소년점프의 아이콘에 걸맞지 않게 평가가 좋지 않았고 용자 시리즈의 최후의 작품인 용자왕 가오가이가는 역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낮은 시청률을 남기고 말았다.[9] 그나마 지금도 계속 방영 중인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은 방영 초기인만큼 많은 주목을 받았고 소녀혁명 우테나는 복합한 스토리와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작품 자체는 호평을 받았다.

4.4. 1세대 아이돌의 본격적인 등장[편집]

또한 가요계에서는 H.O.T.의 신드롬을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1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개막하였다. 1세대 아이돌의 시작점과 같은 그룹인 H.O.T.는 지난 해 연말에 이어 연초에도 캔디의 신드롬적인 인기로 본격적으로 한국 아이돌 시대를 만들어 냈고, 이후 정규 2집의 후속곡들인 행복 We are the Future의 연이은 홈런 히트곡을 만들어 내면서 그 해 임창정이 대상을 수상한 KBS 가요대상을 제외하고 MBC 가요대상, SBS 가요대전, 골든디스크 시상식, 서울가요대상에서 모두 대상을 휩쓸면서 본격적으로 가요계에 신드롬을 일으킨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젝스키스가 데뷔를 하게 되고, 같은 해 11월에는 S.E.S.가 데뷔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가요계에서는 아이돌들의 시대가 개막한다.

4.5. "인간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한 해"[10][편집]

1997년 mbc에서 보도된 국내 연도별 10대 뉴스






국내와 마찬가지로 1997년 한 해는 국외에서도 국제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한 해였다.
- 2월 19일 덩샤오핑 사망, 8월 31일 다이애나 사망, 9월 5일 테레사 수녀 사망
- 6월 29일 미국의 권투 선수 마이크 타이슨 에반더 홀리필드의 귀를 깨문 핵이빨 사건[11]
- 7월 1일 홍콩반환, 동남아 금융위기
- 7월 이후 슈퍼엘니뇨 세계 강타, 7월 4일 미국 패스파인더호 화성 착륙, 2월 23일 복제양 돌리 탄생 등

덩샤오핑 테레사 수녀, 다이애나 비가 세상을 떠났고 복제양 돌리가 탄생해서 생명 복제를 둘러싼 윤리와 과학의 논란이 제기됐다. 또, 아시아에서는 금융 위기가 휩쓸었다. 97년 하반기는 홍콩의 중국 반환으로 시작됐다. 한편, 유럽에서는 좌파 진영이 제2의 절정기를 맞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는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욕구가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다는 것을 입증했다. 동남아에서는 금융위기의 태풍이 몰아쳤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휩쓴 금융위기는 이제 한국에 상륙해 이른바 국제통화기금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는 청년실업 및 계층 간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증가 등의 후유증으로 남아 현재까지 유효하다. 금융 재앙과 함께 엘리뇨의 자연 재앙이 닥쳤다. 엘리뇨가 몰고 온 기상 이변으로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가뭄으로, 페루와 멕시코 그리고 아프리카 동북부에서는 폭우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우주에 대한 사람의 호기심이 패스파인더라는 꽃을 키운 것도 바로 97년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수백 년이 지난 뒤 1997년에 가장 큰 기록으로 남을 사건은 복제양 돌리의 탄생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신의 작업으로만 남겨져온 사람창조 작업이 사람의 손으로 넘어온 시점인, 그래서 사람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97년이라고 평했다. 1997년 세계 뉴스, 시련도 기쁨도 아듀

4.6. 정보인권 침해의 해 시즌2, 1997년[편집]

당시 PC통신/인터넷 이용자들은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제16조 개정 파동과 PC통신 상의 한총련 관련 게시글 및 아이디 무단 정지 및 삭제, 지오시티 전면 접속 차단, 수사기관에 의한 PC통신 무단감청 증가, 15대 대선 관련 통신 단속 등의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 침해로 1996년보다 못한 절망의 시기를 보냈다. 게다가 전자주민카드 도입이 빠르게 진전되면서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프라이버시 침해와 정부의 빅브라더화에 대한 우려가 보였으나 전자주민카드 도입 건은 IMF로 인한 긴축 재정과 전자주민카드 제도에 반대한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4.7. 1997년 외환 위기 시작의 예고, 한보그룹의 몰락과 총수 구속[편집]




이 해는 정초부터 재벌 중 하나인 한보그룹이 몰락을 하게 되었던 해로 IMF와 더불어 한국경제사의 쓰라리고 아픈 기억이 있는 대목이다. 90년대까지만 했어도 한보그룹은 상아제약 등을 인수하며 다방면에서 잘 나가려고 하였지만, 1997년 초반에 들어서 정태수 당시 한보 회장의 비리가 겹치고 국회 청문회 등에도 출석하면서 그룹 경영에 최대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결국 부도로 파산하면서 IMF 직전에 해체된 그룹이 되었다.

한보그룹의 파산과 몰락은 사실상 이 해가 한국경제 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던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1997년말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 신청을 하게 된다. 결국 이 한보비리와 파산은 훗날 IMF 구제금융의 예고가 되었던 것이었다.


4.8. 문민정부의 지지율 하락과 위기[편집]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손을 맞잡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의 모습

1993년부터 온갖 대형사고와 비리사건으로 지지율이 내리막을 치닫고 있던 김영삼 문민정부에게도 이 해는 레임덕의 극치였다. 일본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조선총독부를 해체한 것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과 과거사 청산 및 하나회 해산,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1996년 OECD 가입으로 지지세 행진을 이어갔던 김영삼 정부였지만, 1997년 정초에 들어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으로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재개정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리어 한보 사태와 아들 김현철 스캔들로 김영삼의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또 노동법/안기부법 파동과 김현철 스캔들은 1차적으로 당시 당 대표인 이홍구를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중도 하차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민주계의 좌장격이던 최형우 의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당 대표로 지명된 것이다. 이회창 대표는 유리한 입지를 활용해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김영삼의 레임덕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또 그해 연말에 외환위기까지 찾아오면서 김영삼은 후계 구도에서까지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여 우울해하던 김영삼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끌어내리게 만들었다. 일찍이 찾아온 레임덕 때문에 15대 대선에 영향력을 별로 행사하지 못하였고, 숱한 문제들로 인해서 비난이 가중되어 있기는 하나, 문민정부의 개혁과 사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외환위기가 싹 걷어가 버렸다.

외환위기는 이미 1996년 말 외채가 1천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그 조짐이 보였지만, 정부의 안이한 늑장대처와 기업의 계속된 차입, 금융권의 무분별한 대출로 1997년 11월에 이르러 결정적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오히려 김영삼은 "내부적으로 위기 대책을 진행하되 대외적으로 위기를 감추자는" 식의 구시대적 발상으로 외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런 전략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여기에는 경제 정책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 등 경제 관료들의 잘못이 크지만 김영삼 역시 국정 통솔자로서 비난을 면키가 힘들었다. 이로써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을 제공케 해 준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 IMF 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문민정부에 향해졌다.

이렇게 해서 집권 초기 90%대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는 아예 통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김영삼 퇴임 이후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12]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시기는 우루과이라운드와 WTO 체제의 등장으로 직면되는 세계사적 전환기로서 한국은 대내외적으로 숱한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이자 위기와 기회를 내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그 위기를 기회로 살리지 못해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고 자신은 파멸이란 구덩이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 1998년
 
이 해는 한국에서 문민정부에서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해이자, 헌정사상 최초로 권력이 보수정당에서 중도진보 정당으로 넘어가는 순간이기도 했다.[1] 세계적으로 UN에서 지정한 '세계 해양의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 정부 앞엔 해결해야 할 온갖 문제가 쌓였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 한 해를 정권교체보다 IMF, 외환위기, 실업난, 노숙자라는 네 단어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아래 사건들에서도 나오지만 엄청나게 많은 회사들이 부도/화의/법정관리 등으로 흑역사를 맞게 되었다. 이 해에는 초중고교 학생들과 대학생 가방 태극기가 달리기도 했다. 금 모으기 운동도 있었고. 게다가 직장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도 이 해이며, 노사 갈등도 전보다 더 치열해져 파업만 터지면 시가지는 화염병과 쇠파이프 천지가 됐다.

언론/대중매체 분야에선 대기업이 언론사나 문화사업에 서서히 손을 떼는가 하면, 영남일보, 부산매일 등처럼 부도나거나 폐간되는 지방신문사가 많았다. 프로스포츠에도 타격을 입혔는데, 모기업이 부도가 난 해태 쌍방울이 이 해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 정치권에선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전년도 15대 대선 때 불거진 '북풍', '세풍', '총풍'에 메스가 가해졌고, 제2회 지방선거에선 새정치국민회의가 광역단체장 6곳, 기초단체장 232개 중 84개에서 당선해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으며, 특히 서울지역에선 시장을 비롯해 19개 구까지 석권하여 '야도(野都)'를 '여도(與都)'로 바꾸기도 했다. 학계에선 하반기엔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 파문이 일었다. 환경 분야에선 동강댐 건설 계획을 놓고 파장이 일었다.

또한 이러한 시대상 때문에 방송가에서는 심심하면 IMF 드립이라는 웃지 못할 드립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무언가 긴축스럽거나 저가형 티나는 것들 혹은 절약스러운 것들에 IMF라는 수식어를 붙였다.[2] 롯데리아에서도 IMF버거라고 빈티나 보이는 아주 간단한 햄버거를 만들어 팔았던 시절이다. 가공육 업계에서는 IMF 김밥햄이라는 저가형 햄도 파는 등 상업에서도 IMF라는 수식어는 자주 쓰였다.

그리고, 이 해 발행된 오백원 주화는 화폐 수집가들에게 엄청난 고가로 팔린다. 한국은행에서 매년 제작한 주화세트용으로 딱 8,000개만 제작되어서 증정용으로 쓰였기 때문.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와중에서도 1998년부터 시작된 벤처기업 열풍이 김대중 정부의 IT산업 육성정책으로 힘입어 어둠의 전설, 미르의 전설, 리니지  전설이 된 온라인 게임이 쏟아진 한 해였다. 이러한 온라인 게임이 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빌 게이츠, 손정의 회장을 초청하여 의견을 들은 후[3] 전국의 관공서에 인터넷 인프라를 설치해서 전국의 모든 곳에 인터넷이 연결된 세계 최초의 국가를 만들어낸 배경이 있다.[4] 특히 손정의는 아직 일본에서도 못 이룬 것을 한국이 해냈다며 부러워하는 말을 방송에서 할 정도였다. 민간에만 맡겨두면 인구가 적은 곳은 상당히 늦게 인터넷회선이 들어가거나 채산성을 빌미로 아예 들어가지 않을 수 있지만[5]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있는 관공서에 인터넷 인프라를 1998년~1999년 중으로 불과 1년 만에 모두 설치했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해 초까지 대립 일변도이던 남북관계에선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해이기도 한데,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전임 대통령들의 대북 강경노선 대신 '햇볕정책'을 창안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팔순을 넘은 나이에 소떼 1만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금강산 유람선관광 성사까지 달성해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김대중 정부를 냉담하게 여겼고, 그런 연유로 속초 잠수정 침투사건과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 '광명성 1호' 발사 파문, 금창리 핵시설 파문 등이 터졌다.


한편, 엔저 현상으로 일본 엔화가 1998년 6월 15일, 사상 최저치인 145엔대까지 올라갔고,같은 해 8월 11일에는 147엔으로 또 기록을 경신하였다.


그로 인하여 6월 15일에는 종합주가지수(현재 코스피지수)도 주가가 300선 마저 붕괴된 288로 마감돼 87년 3월 수준으로 떨어졌다.

세계적으로도 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로 러시아 루블화가 흔들리며 8월에는 국채 모라토리엄(채무 지불유예)까지 선언했고, 이것이 다시 즉각 남미의 경제를 들썩이게 하면서 대공황 공포까지 밀려왔다. 그러면서 브라질도 10월에 IMF체제를 맞았다.


7월 15일, 미-일 언론들이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의 사임을 메인뉴스로 보도했을 정도로 미-일 관계는 하시모토 시절 최악의 갈등을 겪었다. (MBC 자료)

그러나 한일관계에선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는데, 10월 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국빈방문 때 아키히토 한반도에 대한 고통 사과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KBS, MBC)

위와 같이 외교관계가 호전되자 문화관광부가 일본 문화 개방정책을 마련해 이 때부터 일본만화 원판 번역본 및 일본 영화 중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제한적 개방되었으며 일본 가요도 수입되었다. 일부 세간에서는 과거사 사죄를 하지도 않았던 일본의 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은 식민지 시대를 재현할 것이라는 일설 때문에 반대 입장을 나타냈고, 영화, 음반 등 관련 업계도 한국보다 규모가  일본 대중문화에 잠식당할까봐 우려를 표했으나 <하나비> 등 일본 영화 흥행 부진으로 기우가 되었다.

남북한 통틀어 정부수립 50년, 유엔측은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이하던 해였다. 한편 문화관광부는 이 해를 음악의 해로 지정했고, 성균관대학교는 '건학 600년', 역사학계에선 '발해 건국 1300년'을 성대히 기념하였다.

이 해에 지상파 3사인 KBS, MBC, SBS 모두가 각자 음악 프로그램인 뮤직뱅크[6], 음악캠프[7], SBS 인기가요[8]를 개설했다. 왜 동시에 생겼나면 외환위기 때문에 그 전 프로그램이 거의 같은기간 종영됐기 때문이다. 그 후에 새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음악 프로그램들은 카우치의 성기 노출로 강제 종영된 음악캠프[9]를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방영되고 있다. 대신 전년도와 달리 방송 3사에서 립싱크 빈도가 라이브를 초월했다.

영화계에선 문화관광부가 한미투자협정 타결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쪽으로 돌아서자 '한국 영화 종말론'이 나돌았고, 영화인들이 이에 일치단결해 '스크린쿼터 사수'를 목터져라 외쳤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 강변이 개업하였는데 이 영화관으로 인해 한국 영화계의 판도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었을 정도로 영화계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스포츠에서는 프로골퍼 박세리가 큰 활약을 보여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진 우리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으로 인해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고 이동국, 고종수, 안정환 등 연예인급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플레이어들 덕에 K리그가 역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시기이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창단 3년 만에 K리그 우승을 차지한 시즌이기도 하다. 반면 미국 NBA는 시카고 불스의 마지막 3-peat 후 마이클 조던의 하차, 선수노조 파업 등으로 침체기에 빠졌다.

또한 이 해에는 한국군에서 육해공 3군 할 것 없이 판문점 내통사건, 미사일 오발사고 등 대형 사고들이 연달아 터져서 군부가 개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1998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천 3백달러로 집계돼, IMF 사태로 세계 42위 중소득 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KBS, MBC)

1998년의 화두는 IMF체제 하에서의 생존이었다. 정경유착 속에 덩치만 부풀려 온 재벌들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아예 취업의 문을 두드려 보지도 못한 채 2백여만 명이 실직의 아픔을 겪었다.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5.1%에 물가상승률 7.5%, 실업률 7%대 폭등 등 한국경제는 IMF체제 하의 최악의 위기를 겪었던 한 해였다. (KBS, MBC)

1998년 1월이 되자 실업률은 한 달 만에 무려 1.4%P나 폭등하여 4.5%까지 폭등하고 한 달 만에 무려 3300여개의 기업이 도산한다.[10][11] 다음 해 2월이던 1999년 2월, 실업률은 무려 8.7%에 달해 단군 이래 최악의 IMF 위기상황을 실감케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실업난은 한국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이다.[12][13]

게이머들에겐 게임 역사상 최고의 한 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스타크래프트, 하프라이프,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를 필두로 수많은 전설급 게임들을 배출해 큰 파장을 불러온 해였고, 인도네시아에선 5월 독재자 수하르토가 집권 32년 만에 민중의 힘으로 쫓겨나면서 국민들은 독립 53년 만에 '민주주의'라는 값진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IT 업계에서는 구글이 창업한 해이다. 그러나 런칭 당시부터 몇년간은 야후!, 라이코스, 알타비스타 3대장에[14] 비하면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뒤쳐졌으나 이내 뒤집는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8년 올해의 한자는 '(독 독)'이었다.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윤달이 낀 해였다. 당시 윤달은 윤5월.

주말 공휴일이 7일이나 되었다.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요일과 겹쳤다. 그 밖에도 삼일절과 부처님오신날(5월 3일)이 일요일과 겹쳤고,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은 토요일과 겹쳤다. 추석은 10월 3일(토)~6일(화)이었다.[15] 하지만 설 연휴는 1월 27일(화)~29일(목)요일이었고 샌드위치 데이까지 포함하면 1월 25일부터 1월 29일까지 5일[16]을 쉴 수 있었다.

이 해는 전 년도 후 년도의 일어난 사건과 임팩트가 너무 커서 묻힌 감이 심하다. 전 년도인 1997년은 충격적인 엽기적 사고[17]가 많이 일어나고 새해부터 기업들의 부도가 갑자기 연쇄적으로 일어나더니 결국 IMF가 왔고, 후 년도인 1999년은 1000년대의 마지막해인지라 눈에띄기도 하고 세기말 분위기가 많이 강했던만큼 그 사이에 있는 1998년은 존재감이 약한데 별 다른 특징도 없는지라 그 정도가 심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 무렵부터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80년대부터 시작한 고전적인 일본 애니 스타일은 이 해에 대부분 막을 내렸고 세계명작극장이나 용자 시리즈도 모두 막이 내린 시점인데다가 카우보이 비밥이나 카드캡터 사쿠라를 중심으로 하여 현재의 일본 애니 트렌드를 맞추게 된다.

3. 일본문화 개방 한일관계의 대대적인 정상화의 해[편집]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김대중 정부 때 이루어졌던 것도 특기할 만한 사건. 사실, 문화개방 당시 일본은 우리의 빚쟁이였던 터라... 세간의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DJ 및 한국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1998년에는 한일관계에선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는데, 일본 정부 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 시 천황과 김대중 대통령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천황이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 일본 국왕 김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역대 정부에서 일제 침략에 대한 앙금으로 일본문화의 국내 유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으나 이 김대중 정부 들어서 단계적으로 일본문화 개방을 천명하면서 이 때부터 일본문화가 국내에 유입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음지에서 유입됐으나 음지다보니 접한 사람수는 적었다.

이 해에 하나비가 대중문화 개방 후 처음으로 개봉한 일본 영화가 되었으나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이듬해 1999년에 개봉한 러브레터가 국내 개봉 일본영화 최초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18]

4. 타이타닉의 국내 열풍[편집]

또한 이 해는 1997년 말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이 국내에 개봉하였던 시기로 영화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관련 팬시들이 출시되며 국내에 타이타닉 열풍을 일으켰다. 주연 배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케이트 윈슬렛은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지게 되었으며 감독이 바로 터미네이터 1, 2의 메가폰을 잡았던 제임스 카메론이기도 하여서 80년대 터미네이터에 이어서 90년대에도 흥행 보증수표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당시가 IMF 구제금융의 시기였던지라 타이타닉 영화가 호화적이라는 비판 속에 상영을 반대하거나 관람하지 말자는 반대와 시위 등도 열렸었다.

이 열풍으로 국내에서 최고의 이득을 본 것은 바로 아카데미과학. 전 세게에서 타이타닉 1:350 프라모델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모형 회사였는데, 영화의 대흥행과 함께 모형 키트 또한 날개 돋친 듯이 세계로 팔려나갔다.

5. 1세대 아이돌 스타들의 시대[편집]

이 해는 1세대 아이돌 스타들이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였다. H.O.T., S.E.S., 젝스키스, 신화, 베이비복스, 핑클, god, NRG 등의 아이돌 그룹들이 잇따라 데뷔하거나 활동을 하여 국내 최초로 아이돌 문화를 그려나가는 역사를 만들었고 가요사에 있어서도 1세대 아이돌 주역으로 새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1세대 아이돌들의 전성기에 KBS 2TV에서 가요톱텐이 종영된 후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새롭게 만들어본 뮤직뱅크[20]의 첫방송이 시작되면서 1세대 아이돌들을 선두로 방송시기에 들어갔다.

참고로 이 때 데뷔한 신화는 이 때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이 된 2017년까지도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해의 최대 승자는 바로 H.O.T.로서 정규 3집의 후속곡 의 대히트로 김종환이 대상을 수상한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제외하고 방송 3사 가요대상 그랜드슬램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21] 지난 해인 1997년에 이어 1998년에도 가요계의 최후의 승리자이자 최종보스로 등극하였다.
 
 
 
-  1999년
 
 

(워싱턴 AP=연합뉴스) 다음은 미국의 AP통신이 전세계 36개국의 74개 고객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선정한 `99년 세계 10대 사건이다.

1. 코소보 잔학행위와 그에 따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고 공습

2.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성희롱) 고소사건 종료

3. 1만8천여명이 사망한 터키 지진

4. 동티모르 독립투표와 유혈 폭력사태

5. 체첸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공격

6. 뉴밀레니엄과 컴퓨터 2000년 인식오류(Y2K)에 대한 기대와 우려 고조

7. 수백명이 사망한 인도-파키스탄 국경분쟁

8. 수천명이 사망한 대만(대만(臺灣)) 지진

9. 세계 경제 및 주식시장에서 미국 영향력 증가

10.터키 쿠르드반군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 체포 및 사형 선고

 
 
 
노스트라다무스 세계멸망 예언했다고 알려져 있어서 주목을 받은 해이다. 실제로 1999 대한민국이라는 힙합 프로젝트 앨범에서는 MCMXCIX[1]라는 이름의 노래로 이 예언을 노래했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동년도에 나왔던 '천리안 98' CD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저냥 별 일 없이 넘어갔는데, 일각에서는 '물질문명이 종말하고 정신문명이 시작됐다'는 여전한 드립을 치고 있다.[2] 그리고 이때 진짜 지구 종말이 오는 줄 알고 인생이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아무튼 1999년이 무사히 지나간 탓에 묻혔고, 노스트라다무스와 전혀 무관한 마야 문명 달력 때문에 2012년 지구멸망설이 주목받는가 싶었더니 그것도 그냥 넘어갔다. 이후 유일하게 떡밥이 남은 종말론 관련 예언은 2038년 하나만 남게 되었다. 중도진보정권이 한해 전부 여당이었던 최초의 해이다.[3]

정치권에서는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이 된 시점부터 조폐공 파업유도사건, 옷로비사건, 통합방송법 파동, 홍석현 구속 등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거렸으며, 특히 법조계에서 1999년은 흑역사로 기억되는 해인데, 연초부터 대전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고 검찰 초유의 항명 파동이 일어나더니, 그 유명한 옷로비 사건이 터졌고, 급기야 연말에는 전직 검찰총장이자 법무부장관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진 거다. 특히 검찰과 관련하여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이 일어나서 검치(檢恥)의 해라는 별칭마저 붙어버렸다.

사회적으로는 화성 씨랜드 참사,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신창원 체포, 고문기술자 이근안 자수 등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하반기에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당시 참전 미군들의 증언이 AP통신에 보도되면서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 논란이 다시금 수면에 떠올랐다. 남북관계에선 제1연평해전과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이 터져 악화될까 싶었지만, 남북통일농구대회 개최 등으로 화해 흐름을 계속 이어갔다.

스포츠에선 한국프로야구가 사상 최초로 매직-드림 양대리그로 개편했으며, 전년도 2년간 7위였던 한화 이글스가 장종훈, 구대성, 송진우, 한용덕 등의 활약에 힘입어 1999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달성하던 해이다. 상대는 전년도 2년간 8위였던 롯데 자이언츠인데, 특히 롯데는 플옵 7차전 중반까지 이승엽, 김기태, 임창용, 김종훈 등 스타급 전력들이 포진한 삼성 라이온즈에게 궁지에 몰리다 임수혁의 막판 홈런으로 코시에 가는 기적을 선보였다.

반면 쌍방울 레이더스의 팬들에게는 흑역사 of 흑역사이다. OB 베어스가 아닌 두산 베어스가 뛴 첫 해로, 2년 연속 한 계단씩 상승하는 3위[4] 한화에게 업셋을 당했다만,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K리그에서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정규리그-대한화재컵-아디다스컵-슈퍼컵 4관왕을, EPL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정규시즌-FA컵-챔스 3관왕을 창단 이래 처음으로 각각 달성했고, KBL에서는 청주 SK 나이츠가, NBA에서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모두 창단 첫 우승을 달성했는데, 특히 샌왕은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단축시즌 속에 치른 터라 여러모로 기적의 해라 할 수 있다.

오덕들에겐 코믹월드가 이해 5월 서울 동대문 프레야타운에서 첫 행사를 가진 해로 기억되기도 한다.


엔하위키 미러 웹 페이지 버전이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한편 UN은 이 해를 '세계 노인의 해'로, 문화관광부 사진, 영상의 해로 각각 지정하였다. 철도청은 1899년 경인선 개통을 기준으로 '한국철도 100년'을 맞이했고, 부산에서는 '부마민중항쟁 20년'을 기념해 부산민주공원을 조성했다.

1999년 초반에도 실업난은 여전했다.1999년 2월, 실업률이 8.7%라는 숨막히는 수준을 나타내어 경제난이 극에 달했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실업난은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출처1, 출처2

그래도 우울했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전 해인 1998년에 경험했던 -5.5%라는 역사상 최악의 경제성장률 +11.5%로 반전시켰던 해이기도 하다.[5] 이 과정에는 벤처기업을 위시한 IT버블이 지대한 공헌을 했기에 다음 해인 2000년 말기부터 IT 거품붕괴로 다시 한 번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9년 올해의 한자는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했기 때문인지 '末(끝 말)'이었다.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이 일요일이고, 부처님 오신 날, 제헌절, 추석 다음날, 성탄절이 토요일이므로, 주말 공휴일이 7일이었으며 일요일 기준으로 잡아도 3일이 겹쳤다.[6] 더불어 신정 휴일이 1월 1일 당일로 변경되어 '신정 연휴'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7]

3. 한국 인터넷 시대의 원년[편집]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1997년 말기부터 시작된 벤처기업열풍이 김대중 정부의 IT산업 육성정책으로 힘입어 어둠의 전설, 미르의 전설, 리니지, 바람의 나라  전설이 된 온라인 게임이 쏟아진 한 해였다. 어둠의 전설, 미르의 전설은 이때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러한 온라인 게임이 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98년 6월,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 빌 게이츠, 손정의 회장을 초청하여 의견을 들은 후[8] 대한민국 전역의 관공서에 인터넷 인프라를 설치하여, 모든 곳에 인터넷이 연결된 세계 최초의 국가를 만들어낸 배경이 있다.[9] 특히 손정의는 아직 일본 미국에서도 못 이룬 것을 한국이 해냈다며 부러워하는 말을 방송에서 할 정도였다. 민간에만 맡겨두면 인구가 적은 곳은 상당히 늦게 인터넷회선이 들어가거나 채산성을 빌미로 아예 들어가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있는 관공서에 인프라를 불과 1년만에 모두 설치했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이 1999년 한해부터 대한민국 전역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 PC방이 대대적으로 생긴 것도 이때부터이다. 하나로통신 한국통신도 가세하여 1998년 두루넷[10]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고 불과 1년만인 1999년 한 해 동안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가입자 수를 37만 명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1999년 초부터 시작된 PC방 스타크래프트 열풍으로 임요환, 쌈장(이기석) 등 프로게이머들이 대대적으로 이때 탄생되었다.[11] 더 나아가 삼성전자가 '애니콜 인터넷폰(SCH-M100/SPH-M1000)'을 출시하면서 무선인터넷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듯이, 인터넷의 보급 확대에 따라 포르노물도 무차별적으로 우리 컴퓨터에 유입되자(대표적으로 1998년 인터넷을 들쑤셨던 소위 'O양비디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8월 25일에 '사이버공간에 국경을 세운다'는 취지로 음란물 차단을 위한 기술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아케이드 게임계에서는 일본 코나미가 1997년 말 <비트매니아>를 시초로 1998년 <댄스 댄스 레볼루션>을 내면서 1세대 리듬게임 붐을 일으켰고, 한국에서는 EZ2DJ 펌프 잇 업이라는 아류작이 나타나 기존에 먼저 출시되었던 게임들과 경쟁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외에도 1세대 리듬게임 붐에 편승하려는 국산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기존에 출시가동되었던 비마니게임도 한국에서는 이지/펌프와 간신히 호각세를 유지하던 판이다보니 이지투와 펌프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물론 이러한 2차 아류작 태반이 지닌 1차적인 문제는 낮은 완성도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 2000년
 
 
미국 대한민국에 형성된 IT버블이 꺼지면서 파산자가 속출한 해이기도 하다. 2000년 미국 S&P500지수는 10.5%의 하락률을 기록했고, 한국증시는 미국보다 훨씬 더해서 코스피가 연초보다 52%,벤처기업 중심인 코스닥은 80% 하락한 채로 마감하여 세계 1위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증권 투자자들 중에서 IT버블 붕괴로 인한 주가폭락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한국경제 성장의 새 원동력으로 기대되었던 젊은 벤처기업인들이 주가조작, 분식회계 등 기존 재벌의 문제점을 답습하고 유동성 위기에 처하자 정치권에 기대는 등 도덕적 문제점마저 노출해 많은 실망을 샀다. 2001년에 터진 정현준 게이트라든가 골드뱅크 김진호 사건이라든가 기타 등등. 2000년 한국 증시 10대 사건 기사 사회적으로는 의약분업을 골자로 한 개정 약사법 시행을 앞두고 의사들이 분노해 병원을 닫아가며 시위를 해서 의료체계에 혼란이 생겨 이슈가 됐다.

그러나 정작 2010년대의 미국인들에게는 9.11 테러가 나기 직전의 "미국이 가장 위대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해가 2000년이 되어버렸다! 이는 정당을 가리지 않는데, 이 설문의 결과는 정확히 2000년이 살기 좋았다기보다는 9.11 이전이란 상징성일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고 여기는 90년대 호황기의 정점에 달했던 해이기도 하고. # NBA에선 코비-샤크 라인을 내세운 LA 레이커스가 12년만에 파이널에서 트로피를 되찾아 '명가의 부활'을 알렸고, MLB에선 뉴욕을 연고로 하는 두 팀이 44년만에 WS에서 맞붙어 화제를 모았다.

한국에선 지난해부터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의혹과 매향리 미군사격장 피해 사실이 불거지면서 '반미'가 이슈로 불거지기 시작했고, IT 분야에선 인터넷 시대가 피부에 와닿기 시작한 첫 해이기도 하다. 1999년 3월 31일에 시작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이해에 점차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기존의 PC통신 동호회를 대체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서비스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2]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만 해도 HTML 태그를 비롯한 Java를 배운 고급 사용자나 관련 사업자들의 영역이었던 홈페이지 개설 및 운영이, 인터넷 서비스 업체 및 각종 포털 사이트들에서 무료 홈페이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일반 사용자들도 손쉽게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할 수 있게 되어 당시에 '인터넷 홈페이지 만들기' 열풍이 불며 급속도로 대중화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며,[3] 휴대폰으로 직접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기도 했다.[4]

빛이 있다면 어둠이 있듯, 다른 한편으로 '정보통신의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통칭 통신질서확립법)' 파동으로 공권력 차원에서의 인터넷 검열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면서 사이버 공간에서의 표현의 자유 침해가 우려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통신질서확립법 반대 사이트, 2000년 통신질서확립법 반대운동 백서)

방송계에선 4월의 <태조 왕건> 방영으로 고려사 붐이 적지 않게 일기 시작한 해이고, 그전에 1월에 MBC 특별기획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봤니?>를 시초로 실험적으로 HD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8월 31일 SBS를 시초로 일정 시간 동안 시험방송을 개시했다. 9월 KBS가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죤과 함께 3원 생방송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만들면서 남북 방송교류가 더 활성화됐다.

가요계의 주 이슈는 조성모의 독주, 서태지의 컴백,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중국행 한류열풍 등인데, 인터넷 문화의 발달에 따라 소리바다 등을 통한 MP3 불법다운로드가 막 활성화되던 시점이었기에 국내 음반시장의 최전성기이자 마지막 황금기로 기록되는 해이다.# 조성모, 서태지, god는 이 해에 발매한 정규앨범에서 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특히 조성모의 3집 앨범은 발매 4일만에 100만 장이 넘게 팔리며 총 2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달성했다. 더불어 2.5집 리메이크 앨범도 1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2000년 발매 앨범의 판매고 순위 1위와 2위를 석권하는 등 그야말로 조성모의 해라 불릴 정도의 전성기를 보낸다. 또한 god도 최대의 히트곡 거짓말이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정규 3집이 150만장 대의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2000년에는 전체 음반 판매량 3위를 기록하면서 KBS 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미국에서 사실상 은둔생활을 하던 서태지는 8월 29일 경찰과 경호원의 철통같은 경비 속에서 귀국한 후, 9월에는 머리 스타일을 붉게 물들인 드레드 헤어로 하고 정규 6집을 내 당대 한국에서 생소한 가요차트 프로 사전녹화무대를 선보였다. 이 앨범은 선 판매 90만장에 총 110만장을 기록했다.

특히 2000년에는 밀리언 셀러를 달성한 가수들뿐만 아니라 H.O.T., 이지훈, 스티브 유, 홍경민, 베이비복스, S.E.S., 박지윤, 김현정, 자우림, 신화, 핑클, 코요태, , 컨츄리꼬꼬, 원타임, 김범수, J.ae, 주영훈, 조규만, 이소은, 채정안, 이정현, 백지영, 드렁큰 타이거 등의 1세대 아이돌 시대(1996년 하반기부터 1999년까지)에 데뷔한 가수들과 신승훈, 윤종신, 서태지, 김원준, 이현도, 엄정화, DJ DOC, , 김경호, 조장혁, 임창정, 터보, 소찬휘, 클론 등의 1세대 아이돌 이전(1996년 상반기 이전) 출신의 톱스타나 중박 이상의 스타 가수들이 한꺼번에 컴백하여 활동하면서 당시 막 데뷔했던 신인인 보아, 샤크라, UN, 문차일드, 화요비 등의 일부 가수들만 제외하고는 량현량하, 파파야처럼 주목받았지만 단명하거나 아예 주목받지도 못 한 채 흑역사로 사라지는 현상이 시작된 시기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데뷔하여 훗날에 가장 성공한 스타는 BoA가 유일하지만 거대 기획사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전략적으로 밀어준 효과가 컸다고 볼 수 있으며, 데뷔 초반에는 문희준에 버금가는 엄청난 악플에 시달리며 무척 고전했다가 일본에서 대박을 치고 2002년 발표한 No.1으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급상승한 케이스다.

또한, 1999년 말부터 솔로 앨범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박혜경에 이어서 은지원 등 1세대 아이돌 시대부터 활동했던 가수가 솔로로 전향한 케이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이도 했다. 같은 시기 클론과 안재욱, NRG, H.O.T. 등도 홍콩에 이어 중국에도 진출해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이와는 반대로 NRG 멤버 김환성의 요절, 백지영의 비디오 파문, 강원래 오토바이 사고 등 안 좋은 사건이 터졌다.

한편 이 해의 초등학교 1,2학년[5]부터 그 유명한 제7차 교육과정이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초등학교 3학년 이상 모든 학년[6]에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7]

대한민국의 고령화가 시작된 해이다.(고령화사회)

2000년 6월 15일, 1945년 남북분단 이래 사상 최초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고 6.15 남북공동선언이 체결되어 남북한 공식적인 화해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같은 해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호주에서 열렸던 2000년 시드니 하계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동시입장을 하는 등 남북관계가 급변을 하였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평화통일 기반형성에 대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UN은 이 해를 '세계 평화 문화의 해'와 '세계 감사의 해'로 지정했다. 광주광역시에선 5.18 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이했고, 특히 기념식장에 김대중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처음 참석해 큰 주목을 받았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2000년 올해의 한자는 '金(쇠 금)'이었다.

3. 새천년의 시작이자 20세기 제2천년기의 마무리와 마지막 해[편집]

이 해는 2000년대 새천년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20세기 제2천년기의 마무리하는 마지막 해이다. 먼저, 이 해는 1997년 11월에 일어난 외환위기에 의한 IMF 관리 체제가 이어졌다. 또,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기 전이라 김포국제공항이 모든 국제선 역할을 담당했던 마지막 해이며, 고속도로 노선체계 대개편과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대개편이 일어나기 전이다. 방송가에서는 국내에 HD방송이 도입되기 전이고[8], SBS가 2세대 로고를 사용하던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며, 강원도, 제주도, 경상남도 민영방송이 정식 개국하기 전이다. 문화계에서는 PC통신이 시민들 사이에서 애용되던 시절이다.[9] 또한 승강기 분야에서는 1990년대부터 생산된 기종들이 다수 생산되던 해이다.

이 해는 대체적으로 시민들에게 기쁨을 안겨 준 해이며, 수십 년이 지나도 이 해를 거쳐 온 시민들 사이에선 2000년은 사건사고가 적은 꽤 특별한 한 해로 기억된다. 대표적인 이유는 작년인 1999년에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Y2K 대란에 대한 두려움,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가 있었고, 다음 해인 2001년에는 국민의 정부 임기 후반 비리 의혹, 홍제동 화재사고, 9.11 테러 등이 있었으나 이 해만큼은 대규모적인 사건사고와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사고의 빈도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10] 오히려 이 해 연초에는 새천년의 시작으로서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고, 연중에는 2000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와 대한민국 경제의 오름세, 연말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다가올 21세기에 대한 희망 섞인 각오로 2000년은 범국민적으로 들떠있던 한 해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사건과 더불어 암울하게 시작된 20세기는 가슴아픈 역사인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 35년이라는 긴 시간의 일제의 식민지와 해방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손쓸수도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들의 노력, 군부독재 시대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루고,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세계에 널리 전파하고, 기술의 발전과 새천년 맞이까지 격동의 20세기를 희망찬 세상속에서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 2000년은 남북한 역사상 처음으로 두 나라의 정상들이 만난 남북정상회담과 평화통일을 염원한 선언인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해이기도 하다. 위의 두 사건 덕분에 햇볕정책이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 서울과 경기도 소재 남녀공학인 중학교들이, 이때부터 모두 혼성반으로 편성 되기 시작하였다.

 
- 2001년 
 
 
 

 

- 2010년

2010년 경향신문 선정 국내 10대 뉴스
  
1. 천안함 침몰 46명 희생, 조사 결과엔 의혹 여전 外  
2. 북, 연평도 포격… 한국전 이후 첫 도발
 
3. 총리실, 민간인 사찰… 靑 개입 파문 
4. 6·2선거 여당 완패로 ‘지방권력 교체’
 
5. 북, 김정일 3남 김정은 ‘세습’ 공식화 
6. 세종시 수정안 백지화… 정운찬 총리 사퇴
 
7. 스마트폰 타고 SNS 사용자 폭발적 증가 
8. 반대 무릅쓰고 4대강 사업 밀어붙이기
 
9. 김연아, 한국 피겨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 
10. 한나라 예산안 날치기, 심상찮은 후폭풍
 
2010년 AP 선정 10대 뉴스 (뉴욕 중앙일보)
  
1위, '21세기 최대 재앙' 멕시코만 원유유출
2위, 건강보험 개혁법안 통과
3위, 중간선거 공화 압승
 
4위, 경기 침체 장기화
5위, 아이티 대지진
6위, 중간선거 승부 가른 티파티
 
7위, 칠레 광부 33명 구조
8위, 이라크 전쟁 종료
9위, 위키리크스
 
10위, 아프간 병력 증파
 
- 2011년
 
연합뉴스는 2011년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국내, 국제 10대 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김정일 사망
2. '안철수 돌풍' 정치권 강타
 
3. 한·미 FTA 비준안 국회 통과
4. 저축은행 사태
 
5. 2018 평창겨울올림픽 유치
6. 복지 논쟁
 
7. 종편·신규 보도채널 출범
8. 우면산 산사태
 
9.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와 장기 고공농성
10. SLS 이국철 폭로 사건

 

다음은 AP가 선정한  2011년 10대 뉴스(득표 순).

▲빈 라덴 사살 = 미국이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 10년간 추적 끝에 빈 라덴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미군 특수부대는 지난 5월 1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는 빈 라덴의 은신처를 급습해 사살하고 몇 시간 후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 수장했다.

▲동일본 3중 재난 = 3월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과 후속 쓰나미로 약 2만명이 숨지거나 실종되고 2천180억달러에 이르는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또 인근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대량 유출돼 체르노빌 이후 최악의 원전사고로 기록됐다.

▲'아랍의 봄' = 지난 1월 튀니지를 시작으로 인근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으로 시민혁명이 확산돼 오랜 독재자들이 줄줄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되고 리비아에서는 내전을 거쳐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사망했다. 시리아와 예멘, 바레인에서는 여전히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유럽연합 재정위기 =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역내 국가들이 과도한 재정 적자나 국가채무로 자금 조달 위기를 겪어 유로화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각국이 위기 극복을 위해 긴축에 나서자 이에 반발하는 파업과 시위, 폭동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미국 경제 회복 부진 = 올 한 해 미국 경제는 소비지출, 고용 등이 나아지는 듯 보이는 반면 주택압류가 속출하고 실업률은 9%를 넘는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등 확실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미국판 도가니 사건 파문 = 펜실페이니아주립대 미식축구팀 코치진 한 명이 소년 10명을 성폭행 또는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돼 미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스캔들로 대학 총장과 코치가 옷을 벗었으며, 다른 학교 운동팀의 성폭행·추문 혐의도 잇따라 불거졌다.

▲무아마르 카다피 축출 =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한 독재자 카다피가 반정부 시위와 뒤이은 내전으로 축출됐다. 반정부 세력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지원을 받아 지난 8월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했다. 카다피는 지난 10월 반군에 붙잡힌 후 사망했다.

▲미 의회 재정정책 대치 정국 = 미 의회는 연방정부 부채 상한선 인상을 놓고 지난 8월 정부 폐쇄 직전까지 팽팽한 대치 정국을 이어갔다. 이 같은 정치력 부재는 이후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키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월가 점령 시위 = 지난 9월 미국 맨해튼에서 청년 실업자를 주축으로 극심한 불균형과 탐욕적 금융자본을 비판하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시작돼 전세계로 확산됐다. 미국의 점령 시위대는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1%에 대한 증세 등 소득 격차 개선을 요구했다.

▲가브리엘 기퍼즈(민주) 의원 총격 = 1월 미 민주당 소속 기퍼즈 하원의원이 참석한 지역구 행사에서 20대 남성이 총격을 가해 9세 여아와 연방판사 등 6명이 숨지고 기퍼즈 의원은 중상을 입었다.

 

- 2012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한반도 안보위기 속에 한국에선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 치러졌다. 새누리당이 두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며 보수 정권 5년 연장에 성공했다. 동아일보가 선정한 국내외 10대 뉴스를 소개한다.
 
1. 박근혜 첫 과반-역대 최다 득표로 당선
2. 싸이 ‘강남스타일’ 유튜브 10억건 조회 기록
 
3. 북한北, ICBM급 장거리 미사일 발사 성공
4. 런던올림픽 종합5위… 원정대회 최고 성적
 
5. ‘피에타’ 축포 속에 한국영화 관객 1억명 돌파
6. 국가신용등급 상승 미소… 하우스푸어 눈물
 
7. 세종시 공식 출범… 행정부처 속속 이전
8. 삼성-애플 세기의 특허소송 지구촌 확전
 
9. 돈검사… 性검사… 브로커 검사… 檢의 추락
10. 정치인 변신한 안철수… 새정치 실험 진행중
 
2012년은 글로벌 ‘권력이동’의 해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재선 성공, 중국 시진핑 시대의 개막, 일본 우파 아베 정권 출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귀환…. 미국과 중국이 신(新)패권 경쟁에 돌입한 사이 북한 김정은은 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동아일보가 선정한 국외 10대 뉴스를 소개한다.
 
1. 시진핑 등극… 오바마 재선, 푸틴 아베 재집권
2. 스페인 넘은 재정위기 파고 佛-英으로 확산
 
3. 일본日 센카쿠 국유화선언… 동아시아 영토갈등 촉발
4. 미얀마 수치 여사 의원 당선… 민주화 꽃 활짝
 
5. 시리아 내전 4만여명 사망… 40만 난민 고통
6. 中중국 지도부 암투 드러난 보시라이 스캔들
 
7. 소니 샤프 파나소닉… 고개숙인 日일본전자 트로이카
8. 이슬람권 다시 번진 反美시위… 미국美대사 희생
 
9. 팔레스타인 국가 인증… 이스라엘과 충돌 악화
10. 영화관에서… 초등교에서… 미국美 총기난사 악몽
 
 
- 2013년
 
 
 2013년 연합뉴스 선정 국내 10대 뉴스
 
 [ns-2013ykoryh]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유출 의혹을 둘러싼 논란과 공방이 치열하게 이어진 한해였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충격을 줬고 경제 분야에서는 이른바 '갑을관계'에서 갑의 횡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박인비 선수는 올 시즌 메이저대회 3연승을 포함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6승을 올리며 한국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올해의 선수'가 되는 개가를 올렸다.
 
북한에서는 지난 2월 3차 핵실험이 있었고 12월에는 2인자로 통하던 장성택이 국가전복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처형돼 격변을 예고했다.
 
연합뉴스가 선정한 올해 10대 국내뉴스는 다음과 같다. 
 
1.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과 검찰총장 낙마
2. 북한 장성택 숙청…김정은 유일 지배체제 공고화
 
3. '내란음모'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구속
4.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유출 의혹 사건과 여야 공방
 
5. 경제민주화와 갑의 횡포 논란
6. 박인비 LPGA 메이저대회 3연승… 한국인 첫 '올해의 선수'
 
7. 북한 3차 핵실험
8. 대규모 원전 비리와 전력 위기
 
9.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 미납 추징금 환수
10. 기초연금 도입 정책 갈등

 

2013년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전세계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전화도청과 이메일해킹을 해 온 사실이 폭로되면서 세계인의 시선을 집중시킨 한해였다.
 
또 중국이 제5세대 지도부가 출범한 이후 동중국해 상공에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센카쿠 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는 물론 우리나라의 이어도까지 포함시킨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해 주변국들의 불만을 촉발시키고 중국의 역내 군사력 강화 움직임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기도 했다.
 
일본은 20년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겠다며 대규모 금융완화, 재정출동, 성장전략으로 구성된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는가 하면 전후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한 우경화 행보를 계속했다.
 
건강보험개혁안을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 연방정부가 셧다운되기도 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연합뉴스는 이런 일들을 포함해 올해 10대 국제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스노든, 미국 NSA 도청 등 정보수집 폭로
2. 동북아 방공식별구역 설정 갈등
 
3. 시리아 화학무기 참사에서 폐기까지
4. 일본 아베노믹스와 우경화 가속
 
5.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6. 베네딕토 16세 교황퇴위와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7. 이집트군 무르시 축출과 유혈 사태
8. 시진핑-리커창 체제 출범
 
9.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타계
10. 초강력 태풍 하이옌 필리핀 강타
 
- 2014년
2014년 진도 앞바다는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블랙홀'이었다. 어이없는 세월호 침몰과 더 어이없는 구조작업 부실로 수학여행중이던 안산 단원고 학생을 포함해 300명이 넘는 사망·실종자를 낸 참사에 온 나라가 눈물을 쏟으며 분노하고 자책했다. 사고수습과 원인규명을 둘러싼 논란 중에 정부가 잇따라 내세운 총리 후보자는 청문회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낙마했다. 내수·투자 부진에 허덕이던 경제는 세월호 악재까지 만나 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단순한 대기업 총수 그 이상의 무게감을 지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쓰러지자 회사도, 한국경제도 긴장했다.
 
6·4 지방선거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뚜렷하게 여야간 승부가 나지 않은 가운데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성향의 후보가 대거 당선돼 교육 정책의 변화와 충돌을 예고했다. 군은 폭행 사망 사건과 총기난사, 방산비리 등으로 내내 휘청거렸고 청와대 비선의혹 문건 유출 사건이 터져 연말 정국에 파문이 일었다. 수능출제 오류 사태가 잇따르면서 교육 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참사의 아픔 속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우리 사회에 한 줄기 빛이었다. 즉위 이래 시종 낮은 자세로 파격 행보를 계속한 교황은 방한 기간에도 세월호 유족을 위로하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이 올해 10대 국내뉴스를 선정했다.
 
연합뉴스 국내 10대 뉴스
 
1. 세월호 참사 발생
2.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우리나라에 큰 울림을 주다
 
3.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 : 문건 유출 파동
4. 군 , 잇단 대형 비리 사건, 사고에 휘청
 
5. 안대희, 문창극 총리 후보자 낙마. 고위직 인사 파문
6. 잇단 수능 출제 오류. 교육 현장 큰 혼란
 
7. 6.4 지방 선거 여야 무승부/ 진보 교육감 대거 당선
8. 이건희 회장 심근 경색으로 쓰러져. 삼성전자 어닝 쇼크
 
9. 경기 침체 장기화와 무상 복지 논란
10. 북한 실세 3인방 남한 기습 방문
 
 
국제뉴스 ; 2014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 합병으로 서방과 러시아가 냉전 체제 같은 대립을 계속한 한해였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이라크·시리아 내 세력 확대와 서방인 참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 등 중동 지역의 혼란도 극심했다. 미국에서는 백인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에 따른 항의시위,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홍콩에서는 행정장관 선거제도 반대 시위 등 각국 내 갈등도 이어졌다. 또 서아프리카 3개국을 중심으로 창궐한 에볼라 바이러스로 1만 7천여 명이 감염되고 6천여 명이 사망, 전 세계로 공포가 확산했다. 일본은 집단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고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를 재검증하는 역사수정주의를 이어갔다. 연합뉴스는 올해 10대 국제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러시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신냉전 시대
2. 전 세계 에볼라 공포 확산
 
3. IS 이라크·시리아서 득세 서방인 참수·미군 공습
4.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역사 수정주의 행보
 
5. 미국, 양적 완화 종료…일본 양적 완화 확대
6. 미국 퍼거슨 사태 등 잇따른 인종갈등
 
7. 홍콩 행정장관 선거제도 반대 시위
8. 로제타호 탐사선 혜성착륙…우주탐사 새 장
 
9. 스코틀랜드 분리독립투표 부결… 분리독립운동 확산
10. 이스라엘 가자지구 폭격
 
 
- 2015년
 
2015년 연합뉴스 국내 10대 뉴스
 
[ns-2015ykoryh]2015년 대한민국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신종 전염병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메르스의 전파력에 대한 판단을 비롯해 미흡한 초기 대응으로 메르스 환자가 단기간에 급증하고 사망자가 잇따라 나오면서 온 사회가 불안과 공포 속에 빠졌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가 극심한 내수침체를 겪었다. 사회와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정치권의 난맥상은 국민들의 근심을 더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이 적힌 '금품 메모'를 남긴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파문을 일으켰고, 리스트에 등장한 이완구 국무총리가 낙마했다. 국회는 여야 정쟁으로 예산안의 법정시한 내 처리에 실패하고 내년 4·13 총선을 위한 선거구 획정 협상도 공전을 거듭하는 등 올해도 '식물국회'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는 탈당을 선언해 내년 총선을 4개월 앞둔 야권이 정계개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외적으로는 주한 미국대사가 국내에서 피습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으나 한미동맹을 재확인하며 매듭지어졌고, 북한의 지뢰도발로 최고조에 이르렀던 남북간 군사적 긴장은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의 극적인 타결로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 당국회담으로 이어졌다. 하반기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온나라가 들썩였다. 정부와 여당이 현재 검정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기로 하면서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 학계에서 치열한 찬반논쟁으로 최대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이 올해 10대 국내뉴스를 선정했다.
 
1. 온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
2.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3.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4. 역사교과서 국정화
 
5. '성완종 리스트' 파문
6. 8·25 합의로 남북 이산상봉·당국회담
 
7. 안철수 탈당…총선 4개월 앞두고 제1야당 분열
8. 간통죄 62년 만에 폐지
 
9. 박근혜대통령 중국中열병식 참관… 한일 첫 정상회담
10. 갈등 키운 식물국회…노사정 대타협도 빛바래
 
 
 2015년 연합뉴스 국제 10대 뉴스
 
[ns-2015yforyh]2015년 한해 지구촌은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극단주의 무장세력의 테러로 충격과 불안에 시달렸다. 특히 11월 13일 세계의 문화중심 프랑스 파리의 공연장·카페·경기장에 대한 IS 추종자의 연쇄테러로 전세계가 '테러와의 전쟁', 'IS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유럽 각국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극단주의 세력의 잔혹행위와 내전, 빈곤을 피해 유럽으로 몰려든 난민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맞았다. 전에 없던 난민 사태는 그리스 금융위기와 더불어 유럽 연합(EU)의 결속력을 시험하는 요인이 됐다. 
 
테러 및 난민 위기, 경제난 등의 여파로 동유럽과 남미에서는 좌파 정권이 몰락하고 우파가 줄줄이 집권했고, 미얀마 총선에서는 민주투사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야당이 53년만에 군부정권을 밀어낼 수 있는 압승을 거뒀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경제·군사적 세력확장, '굴기'(굴기(굴<山+屈>起: 우뚝 일어섬)로 세계의 세력구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G-2 양강 체제로 사실상 재편되는 모습이었다. 
 
세계 1위 자동차 제조사 폴크스바겐은 연비 및 배기가스 조작 파문으로 소비자의 신뢰를 무너뜨렸고, 미국 대선판에서는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거친 입'을 앞세워 인기몰이에 나섰다. 지구촌의 혼란과 갈등을 뒤로하고 미국의 무인 우주 탐사선 뉴호라이즌스는 태양계 바로 바깥 별 명왕성까지 날아가 인류의 우주 관측사에 이정표를 세웠다. 연합뉴스는 올해 10대 국제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IS의 파리 테러…전 세계 '테러와의 전쟁' 돌입
2. 미국·중국 패권경쟁 격화…중국 군사·경제 굴기
 
3. 난민·그리스사태로 유럽 분열위기… 통합 시험대
4. 미얀마 총선 수치야당 압승… 53년만의 민주화
 
5. 이란 핵협상 13년만에 역사적 타결
6.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파문 일파만파
 
7. 세계 '최대 FTA' TPP 타결…글로벌 무역전쟁
8. 동유럽·남미서 좌파정권 붕괴 '도미노'
 
9. 미국 대선전 트럼프 돌풍…대선 조기가열
10. 뉴호라이즌스호 명왕성 최근접… 인류 우주탐사 새역사
 
 
 
- 2016년
 
 
2016년 연합뉴스 국내 10대 뉴스
 
[ns-2016ykoryh]다사다난(多事多難). 연말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자성어지만 2016년은 그 지닌 의미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올 만큼 곡절 깊은 한 해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40년 지기'인 최순실 씨로 인한 국정농단 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들면서 본인은 물론 박 대통령까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온 국민의 분노가 담긴 광화문 광장의 '200만 촛불'은 결국 헌정 사상 두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이어지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다. 앞서 정치권은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한 여당의 총선 참패로 16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끊임 없는 핵 도발 속에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등 남북관계가 급랭했다. 이와 맞물려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문제가 국내외에서 논란과 갈등을 일으켰다. 이밖에 고질적인 접대문화를 바꿀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이 시행됐으며, 고위직 판·검사가 연루된 법조비리가 재발했다. 경주에서는 규모 5.8의 강진까지 발생하며 한반도가 더이상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경고음이 울렸다. 연합뉴스는 그 어느 해보다도 탈 많았던 2016년 국내 10대 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2. '위대한 촛불집회'…시민혁명 이뤘다
 
3. 김정은 핵도발과 개성공단 폐쇄… 집단 탈북 사태
4. 4·13 총선 집권여당 참패…16년 만의 여소야대 국회
 
5.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전격 시행
6. 사드배치 논란과 중국 반발
 
7.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국
8. 한진해운 청산과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9. 전현직 판검사의 민낯 드러난 법조비리 수사
10. 경주 지진…한반도 지진안전지대 아니다
 
 
 2016년 매일경제신문 국제 10대 뉴스
 
[ns-2016yformk]
 
1. 美대선 승리한 '이단아' 트럼프
2. 美 금리 인상…초저금리 시대 종언
 
3. 反세계화 기폭제 된 브렉시트
4. 지카바이러스 공포 전세계 확산
 
5. '핵협상 타결' 이란 경제제재 풀려
6. 시리아 내전 격화…IS테러 급증
 
7. 반세기 쿠바 집권한 카스트로 사망
8. G2 충돌…남중국해 긴장 고조
 
9. '음유시인' 밥 딜런 노벨문학상 수상
10. 필리핀 두테르테 '마약과의 전쟁'
 
 
 
 
- 2017년
 
2017년 연합뉴스 국내 10대 뉴스
 
[ns-2017ykoryh]대한민국은 촛불 민심이 타오르는 가운데 2017년 새해를 맞았다. 올 초 국민의 시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로 쏠렸다. 헌재는 3개월간의 심리 끝에 대통령을 파면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대통령 파면은 조기 대선으로 이어졌다. 5월 9일 치러진 선거에서는 대권에 재도전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41.0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 대통령은 국정과제 1호로 '적폐청산'을 선언했고, 검찰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각종 의혹을 파헤쳤다. 또 문재인 정부는 신고리 원전의 건설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조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아울러 정부는 치솟는 집값을 잡기 위해 강력한 규제안을 담은 8·2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고, 내년 시간당 최저임금을 17년 만에 최대 폭으로 인상해 7천530원으로 책정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두고는 경북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해 시험이 일주일 연기됐다. 2014년 침몰했던 세월호는 3년 만에 뭍으로 꺼내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끊임없이 요동쳤다. 북한은 6차 핵실험과 잇단 탄도미사일 도발을 감행했고, 한중 관계는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인해 갈등이 계속됐다.
 
연합뉴스는 2017년 국내 10대 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박근혜 대통령 파면…국정농단 재판
2. 문재인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탄생…'촛불혁명'
 
3. 북한 6차 핵실험과 잇단 미사일 도발…핵무력 완성 선언
4. 경북 포항서 규모 5.4 지진…수능 일주일 연기
 
5. '적폐청산'…국정원 댓글·특활비 정치개입 등 수사
6. 사드 배치와 中 '보복'…한중 갈등과 봉합
 
7. 내년 시간당 최저임금 7천530원…인상 폭 17년 만에 최대
8. 시민이 결정한 신고리 원전 5·6호기 운명…숙의 민주주의 실험 성공
 
9. 3년 만에 육지로 올라온 세월호
10. 8·2 부동산 대책 발표…가계부채 1천400조원
 
 
2017년 연합뉴스 국제 10대 뉴스
 
[ns-2017yforyh] 2017년은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핵실험 도발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강력한 제재로 맞서면서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된 한 해였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고받는 '말폭탄'에 한반도 전쟁위기설까지 나돌며 동북아 정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과의 관계 재정립에 나서 국제사회를 당황케 했다. 그 사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신흥 패권국을 자처하는 중국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세계질서 재편을 예고했다.
 
잔혹한 테러 공격으로 국제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시리아와 이라크 내 주요 거점에서 패퇴하며 '칼리프국가' 수립에 실패했다.
 
중동 패권을 둘러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이 고조되며 중동정세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시계 제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연합뉴스는 올해 10대 국제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미국 우선주의' 트럼프에 긴장하는 국제사회
2. 시진핑 중국 권력독점…대국 향한 2막 출발
 
3. 가뭄·홍수·폭염·혹한…기후변화 재난에 지구촌 몸살
4. 트럼프-김정은, 북핵 둘러싼 '희대의 말폭탄'
 
5. 유럽정치 중도기반 상실·좌우 양극화 따른 기성정치의 참패
6. '미투' 확산…지구촌 여성들의 성폭력근절 봉기
 
7. IS '칼리프국가' 수립 좌절…시리아·이라크서 패퇴
8. 임기 내내 트럼프 정부 흔든 '러시아 내통설'
 
9. 北 김정은 이복형 김정남의 국제공항 신경작용제 암살사건
10. 사우디-이란 패권 다툼…중동정세 불안

 

- 2018년

 2018년 연합뉴스 국내 10대 뉴스
 
[ns-2018ykoryh]
2018년은 말 그대로 격동(激動)의 한 해였다.
 
지난해 말까지 악화 일로를 걷던 한반도 정세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다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일순간 급반전했다.
 
직전까지 북미 간 갈등으로 '군사적 행동', '전쟁'이 거론될 만큼 긴장이 고조되던 마지막 분단국에서의 올림픽과 이후 펼쳐진 극적인 평화 드라마는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전쟁과 분단의 상징 판문점에서 분단 65년 만에 처음 남북 정상의 만남이 성사됐다. 4월과 5월, 9월 판문점, 평양, 백두산을 오가는 연이은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비핵화로 가는 불가역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한국사회 내부에서도 되돌릴 수 없는 변화가 잇달았다.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 '미투'가 사회 각계각층을 휩쓸면서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신구 기업 오너와 가족의 비상식적 언행과 엽기 행각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전근대적 '갑질'이 뜨거운 이슈가 됐다.
 
집권 2년차를 맞은 정부는 '주 52시간 근무제'로 과로사회 탈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며, 과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정부패 수사로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이어갔다.
 
4년 만에 치른 6월 지방선거는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 변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보여줬으며, 서울 집값이 급등해 무주택자들의 근심을 샀다.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은 세기의 팝그룹 '비틀스'에 비견될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K팝 전성시대를 열어젖혀, 한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연합뉴스는 2018년 국내 10대 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가속
2. 한국사회 뒤흔든 '미투'…문화계부터 정치권까지
 
3. 노동시간 단축…주 52시간 근무 시대 개막
4. 위기의 사법부…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
 
5. 을의 분노 폭발시킨 오너·기업 갑질 논란
6. 전 세계를 달군 방탄소년단…K팝 열풍
 
7.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과 적폐 수사
8. 서울 집값 급등에 역대급 대출·세금 규제
 
9. 풀뿌리 권력 재편…민주당 기록적 압승
10. 30년만에 안방에서 올림픽…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개최
 

 2018년 연합뉴스 국제 10대 뉴스

 
[ns-2018yforyh]2018년 한해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킨 최대 사건은 '세기의 담판'이었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의 땅에서 68년간 적대하던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역사적 첫 만남을 갖는 장면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해온 전 세계에 커다란 희망과 감동을 선사했다.
 
북한과 극적인 '한반도 데탕트'를 연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러나 '마이웨이'식 일방주의 외교를 구사하며 국제질서를 크게 뒤흔들었다. 13년 만에 극적으로 타결된 2015년 이란 핵(核)합의를 3년도 채 안 돼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렸고, 러시아와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파기를 공식화했다.
 
관세를 무기로 한 중국과의 'G2' 무역전쟁은 글로벌 경제에 커다란 충격파를 던진 동시에 패권 경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 고질병인 난민 문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와 '캐러밴' 행진에 시달린 미주 대륙으로까지 급속히 확산해 지구촌 전체의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또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아이콘이었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 프랑스 정국을 한바탕 들었다 놓은 '노란 조끼' 시위가 올해 국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연합뉴스는 2018년 국제 10대 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68년 냉전 녹인 '세기의 담판'…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2. 美中 '총성없는 무역전쟁'…G2 '글로벌 패권다툼' 비화
 
3. 이란 핵합의·INF 줄줄이 파기…흔들리는 核질서
4. '황제' '차르' '술탄' '파라오'…지구촌 스트롱맨 '전성시대'
 
5.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잔혹살해'…왕세자 '배후설' 일파만파
6. '현대판 프랑스 혁명' 노란조끼 시위…마크롱 '항복'
 
7. 역대급 산불에 폭염·강진·태풍…'신음하는' 지구
8. 지중해부터 제주까지 번진 '난민 앓이'…캐러밴·로힝야도
 
9. 자율주행차 달리고 IT기업 날고…4차 산업혁명 가시화
10. '감동휴먼 드라마' 태국 동굴 소년 구조
 
 
- 2019년
 
 
 
 
 
- 2020년
 
 

-  연합 뉴스 국내 10대 뉴스

◇ 코로나19 대유행…다시 위기 상황

◇ 민주당 총선 압승…'단독개헌' 빼곤 무소불위

◇ 검찰개혁 둘러싼 秋-尹 갈등 1년 내내 지속

 

캬...사진 잘 잡았다. 문재인 정부에 의한 윤석열 찍어내기. 물론 이를 문 정부는 검찰개혁이라 주장한다. 

 

◇ 박원순 극단선택·오거돈 사퇴…정치권 미투 파문

◇ '대책 또 대책'에도 안 잡히는 집값, 전세난까지 심화

◇ 연락사무소 폭파·서해 공무원 피살…남북관계 파행

◇ 텔레그램서 발생한 조직적 성착취…n번방 사건

◇ 방탄소년단·'기생충', 팝과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다

 

아카데미 씹어잡수신 기생충. 봉 감독 머리카락이 강렬하다. 

 

◇ '초일류 기업' 이끈 개척자,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 초강력 태풍이 몰고 온 유례없는 물폭탄

 

----  국제 뉴스(연합 뉴스)

                                                  시체를 쏟아낸 코비드19 

◇ 코로나19 팬데믹…지구촌 보건·경제 붕괴

◇ 바이든 시대 개막…트럼프 전례 없는 불복전

◇ 미중 갈등 고조…점점 더 골 깊어지는 신냉전

◇ '숨을 쉴 수 없다' 미국 인종차별 반대시위 확산

◇ 홍콩보안법 제정…홍콩 자유 위축에 서방 집단반발

◇ 일본, 아베 독주체제 끝나고 스가 시대 개막

◇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왕년의 영광 꿈꾸는 독립선언

◇ 이스라엘-일부 아랍국 국교정상화…이란과의 갈등격화

◇ 기후변화 심화…지독한 날씨 빈발에 우려 증폭

◇ 민간 우주여행시대 개막…스페이스X 유인우주선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