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小史와 歷史를 정리해 보다

조선시대 최악의 3대 기근.

남형윤 2022. 7. 22. 09:34

조선은 세계 역사상 유독 자연재해와 기근이 비일비재한 나라였는데 그 중에서도 3대 메니져 대기근이 있었으니 '계갑대기근', '경신대기근' 그리고 '을병대기근'을 3대 대기근으로 뽑고 있지 ..

계갑대기근 - 임진왜란 중 발생하여 약 70만명 아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간 통틀어 사망한 전체 100만 조선인 중 약 70% 이상이 이때 기근으로 죽음.

경신대기근 - 을병대기근이 있기전  조선 최악의 대기근이자 세계 최악의 대기근.  이 시기 무려 조선 전체 인구의 10-15%에 해당하는 100만명이 굶어죽음. 저 시기 낙태는 물론 유아 살해가 비일비재했고 식인, 심지어 자기가 난  자식을 먹는 사례도 있었다 함. ㅇㅇ



그리고...

경신대기근이 물러간후 50여년이 채 지나지 않아 대망의 을병대기근이 찾아오는데...





숙종 23년 재해는 연속되었다. 삼동에 눈이 내리지 않아 가을갈이 한 보리가 얼고 손상되어 봄 흉년이 들었다. 간신히 봄 파종을 마치고 난 후에는 봄 가뭄이 찾아들었다. 4월 이후 전국을 덮친 가뭄은 5월 이후 벼가 타 들어갈 정도로 혹독해져 각처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참혹한 가뭄이 든 위에 심각한 기상이변이 잇달았다. 찬바람과 독기 서린 안개가 거의 한달 동안 이어지고 바람, 우박, 서리, 눈, 황충 등의 재해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원주, 영월에서는 8월에 눈비가 번갈아 가며 내리고, 9월 초에는 전라도 광주 등 다섯 고을에 눈이 내렸다. 숙종 23년에는 이상저온으로 인한 냉해발생으로 1년 동안의 작황이 극도로 나빴다. 숙종 23년에도 전국에 기근이 들었다. 함경도, 평안도, 경기, 호서가 심각하였고 도성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기에 전염병이 겹쳐 함경도와 평안도에 5월 이후 염병 사망자가 1천명에 이르렀고, 관서에서는 보고된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었다.


거듭되는 기근에 갖가지 정상을 이탈한 일들이 벌어졌다. 도적이 단순한 약탈을 넘어 사람을 죽이고, 굶주린 기민이 사람고기를 먹기도 했다. 금성 기민이 임시 매장한 시체를 캐어 그 살을 먹었으며, 평안도 용천의 여자 둘이 공모하여 한 마을 여인을 살해한 후 그 고기를 먹었다. 도적 이억금은 시체의 옷을 벗겨 입었다. 평상시라면 모두 참형에 처해질 행위였다.


도성에서도 유걸인의 도적질이 심해졌다. 정부는 병조판서를 도성 내 유랑거지 주관당상으로 임명하고 비상 대책으로 유걸인을 율도에 임시 수용 후 섬으로 격리수용하도록 했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기근에 시달리던 수백 명의 기민이 대궐로 몰려와 경청 곡식 지급을 호소하다 수어사를 욕하고 그 군관을 때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숙종 24년에도 재해는 잇달았다. 경기와 호서에서는 혹독한 재해로 수확한 작물이 없다고 했다. 연이은 흉년으로 곡가는 급등하여 숙종 24년 6월 곡가는 400% 급등했다. 관서는 전후 6년간 흉년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전국에서 수만 명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사망하였다. 숙종 24년 한 해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국가 공식 통계는 다음과 같다 ‘이 해에 도성에서 쓰러져 사망한 자가 1582명이고 8도에서 사망한 사람이 2만1천546명이었다. 외방에서 보고한 숫자는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많은 숫자에 이르렀으니 기근과 전염병의 참혹함이 실로 전고에 없던 바이다.’ 정부는 죽어가는 기민을 살리기 위해 청에서 곡식 3만석을 들여왔다(황제가 무상으로 내린 1만석과 수입곡 2만석 이 서울, 관서를 비롯한 다급한 곳에 배분되었다. 원래 5만석을 싣고 왔으나 2만석은 수입과정에 문제가 생겨 도로 가져갔다).


대재난은 숙종 2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해 국가 공식 사망자 통계가 서울 3900명, 각도 총합 25만 700여명인 것으로 보아 기근의 참혹함은 지속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숙종 21년부터 시작되어 무려 5년에 걸쳐 계속된 을병대기근의 참상은 숙종 25년에 작성된 기묘호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병자년(숙종 22) 처음으로 장적을 만들어 흉년으로 정지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완성했다. 경외를 통털어 호수가 129만 3천 83호이고 인구가 577만 2천 300명 계유년(숙종 19)과 비교하면 호수는 25만 3천 391호, 인구는 141만 6천 274명이 감소되었다. 을해년 이후 기근과 여역이 참혹했기 때문에 이지경이 된 것이다. ‘ 불과 7년만에 인구의 19.7% 감소(호구 16.39%감소)가 감소되었다. 그런데 김성우는 당시 아약자, 노비의 다수가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을 것임을 예상한다면 이 시기 희상자의 예상수치는 400여만 명(1,416,274명×3) 당시 인구가 최소 1천2백만~최대 1천6백만에 이른다고 가정했을 때 전체인구의 25~33% 정도가 이 시기에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김성우 논문 주 62. 1년 반 정도에 걸쳐 진행된 현종 11,12년 경신대기근으로 희생된 자들의 예상 수치는 140여만 명이었다. 반면 5년여에 걸쳐 장기 지속적으로 피해를 가중시킨 숙종 21~25년의 을병대기근으로 인한 희생자의 수는 경신대기근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을병대기근으로 인한 희생자 수치가 400여 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은 그다지 큰 무리가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때 급감된 인구는 50여년이 지난 영조 29년 무렵 회복된다. 이 시기 재난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 단순히 사망자 수로 비교해도 그 규모가 '20세기 최악의 기근'이라 불리우는 벵골대기근과 맞먹으며, 사망비로 따진다면 벵골대기근은 쨉도 되지 않는 수치이니 놀라울 따름ㅇㅇ. 더군다나 벵골대기근 같은 경우는 2차세계대전 중에 일어났으며, 벵골을 고립시킨 영국 정부에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을병대기근은 자국 백성을 관리하는 조선 중앙 정부의 무능과 관리들의 부패가 화근을 키운 케이스다.  


- 벵골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전체 6000만 벵골 인구 중 150~400여만 명으로 추산.(18세기 초 무렵 조센 인구가 얼마나 많았다고 20세기 벵골 대기근 사상자와 같은 수의 사상자가 나올 수 있나?) 참고로 벵골대기근으로 인한 아사율은 최대치가 6%이다.


-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대약진 운동 기간 중에 아사한 3천만 중공 인구를 사망비로 계산하면 전체 7억 중화 인민 중 3천만이니 대략 5~6%의 사망비가 나옴을 알 수 있다. 역시 벵골대기근과 비슷한 아사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후 중공의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1958~1962년의 대기근이 중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을병대기근은 조선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본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그 권위와 힘을 크게 상실하게 된다. 이후 100여년간 조선 각지에서 민란이 일게 되며(대표적인 난 : 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등) 운요호 사건, 병인양요 등 외세 열강의 침탈을 연달아 받게 되지만 조선 정부는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문화도 보잘것 없고 인구도 보잘것 없는 나라에서 재앙은 세계급을 뛰어넘어 세계 정상을 찍고 있으니 과연 헬반도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게 아님 ㅇㅇ